역사가 잊은 진보 지식인 조헌

2017.12.13 21:01 입력 2017.12.13 21:26 수정

[역사와 현실]역사가 잊은 진보 지식인 조헌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청탁금지법 때문에 학부모들은, ‘스승의날’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꽃 한 송이도 선생님에게 선물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무부의 고관들은 다르다. 그들은 ‘돈 봉투 잔치’를 해도 탈이 없다. 세상에 이런 답답한 일도 있는가?

직업상 나는 조선후기의 역사책을 날마다 읽는다. 그 시절에도 답답한 일은 적지 않았다. 비리와 부패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늘 그렇듯 기득권층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있어, 정의의 실종을 막기 위해 비판의 칼날을 벼렸다. 반계 유형원(1622~1673)과 성호 이익(1681~1763) 등 실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는 후세가 망각한 이들도 없지 않다. 중봉 조헌(1544~1592)이다. 그의 언행은 늘 범상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참 전, 그는 국방의 허술함을 문제 삼으며 철저한 대비를 주문했다. 1592년, 침략군이 바다를 건너 물밀 듯 쳐들어오자, 조헌은 초개처럼 자신의 몸을 던지며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로막았다.

선조 임금과 그 측근들은 조헌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잇따라 현안을 제시했고, 대안을 만들기에 바빴다. 조선사회의 ‘리셋’을 위해 조헌은 고뇌하였던 것이다.

조헌의 삶은, 400년이 넘는 긴 시간의 장벽을 넘어 오늘날에도 공명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가 주목한 사회문제는 다양했지만, 이 글에서는 3가지만 간단히 짚어보겠다. 나머지 자세한 내용은 <중봉집>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첫째는 인재등용의 한계점이었다. 조헌은 명나라의 실례를 들어가며, 조선의 폐습을 도마에 올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관리후보자의 ‘문벌’(門閥)을 따지지 않고 재능만을 심사하였다. 그러하였기에, 풍수사의 아들 손계고(孫繼皐)도 ‘수찬’(修撰)이란 영예로운 관직에 임명되었다. 또, 어머니가 노비였던 성헌(成憲)조차 ‘편수관’(編修官)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은 그와 딴판이었다. 조헌은 고려 중엽부터 권력층이 신흥세력의 성장을 차단하기 위해 “서얼(庶孼)들이 과거를 보지 못하게 막았다”고 성토하였다. 조선시대가 되자 그러지 않아도 좁은 인재등용의 길이 더욱 막혔다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알다시피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재혼한 여성의 자손까지도 벼슬을 금한다고 되어 있다.

조헌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중국의 법과 전통은 완전히 달랐다.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어머니도 재혼한 여성이었다. ‘서얼’이라도 재주만 있으면, 얼마든지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다. 서얼로서 중국사에 이름을 빛낸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조헌은 인재등용의 기준을 재정립하자고 말했다.

둘째, 조헌은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는 풍습도 반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이 태어나고 확산되는 근원을 막거나 끊기게 해서는 안된다. 딸이 이미 장성하였는데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일찌감치 과부가 되어 의지할 데가 없는 이에게는 개가(改嫁)를 허용해야 한다.”

명나라에서는 당사자인 여성의 뜻에 따라 재혼도 할 수 있고, 수절(守節)도 했다. 조헌은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 손뼉을 쳤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성이 재혼하면 자식들의 앞길이 막혔기 때문에, 도리어 끔찍한 범죄행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남모르게 간통했다가 자식을 낳으면, 밤에 내다버리는 일이 이루 열거할 수 없이 많다.” 조헌이 남긴 기록이다. 재혼을 못하게 막기 때문에, 외려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여성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것이 조헌이 찾은 해결책이었다.

셋째, 조헌은 노비문제의 청산을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군역(軍役)의 부담이 너무 컸다. 사람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절간으로 보내든가, 아니면 남의 여종과 결혼하게 했다. 생계가 곤란한 일반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내수사(內需司)’에 국가의 종으로 등록하였다. 결과적으로, 16세기 조선사회에는 노비가 넘쳐났다.

조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노비소유를 제한하자고 말했다. 국가기관인 내수사의 노비 수도 크게 줄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십 년 뒤에는 노비제도가 사실상 폐지될 수 있기를 바랐다.

조헌은 늘 사회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1574년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갔을 때도 그는, 중국의 법과 풍습을 조사하였다. 조선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개혁안이 기득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침몰하고 만 것은 실로 유감이었다. 진보지식인이었던 조헌의 좌절은 개인의 몰락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조선사회는 회생의 길에서 더욱 멀어졌다.

역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도 있다. 조헌은 오늘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무언중에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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