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길

2017.12.29 20:44 입력 2017.12.29 20:45 수정
성원 스님 신제주불교대학 원장

[사유와 성찰]중도의 길

추위가 주인공이다. 동서사방 자유자재하게 우리 반도를 휘젓고 다닌다. 어릴 때 일사불란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뭔가 하나같이 잘 움직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도 이롭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도 통일을 외치는 시대에 자라서일까, 아직도 다양성에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뷔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하는 데 말이다. 그냥 한 끼에 한 가지면 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랬더니 어린아이가 당돌하게 말했다. “그럼 스님은 뷔페 가서 한 가지만 드시면 되잖아요!” 그날 생각했다. 다양한 환경을 전개하고 스스로는 단순하게 사는 것이 옳겠다고. 어쩌면 우리 나이에는 우리도 모르게 다양성을 지양하고 선택의 폭마저 단순히 하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세상은 뷔페다. 음식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다양성이 생명이 되어버렸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를 넘어 보편화가 되고 보니 계절도 우리에게 획일적인 인내를 강요하지 못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상하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삶과 생활은 완전히 다양성에 노출되었고, 선택적 삶은 보편화되어 있다.

예전에 불교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달마야 놀자 2>였던 것 같다. 제목부터 불교적 냄새가 물씬해서 나름 기대에 차서 관람하러 갔다.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영화의 내용에 실소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 흥행 위주의 영화 한 편에 실소할 것까지 있겠는가? 이것을 불교영화라고 우기며 보러 가자고 했던 사람에게 쓴웃음을 띄워 보내야 했다.

소재와 주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제목부터 철저히 불교와 불교적 모티브를 소재로 사용해 관객들에게 폭소를 전하는데도 스님이 나오고 사찰의 모습이 나오니 불교영화라 했다. 어쩌면 불교를 우롱하는 영화였는 데 말이다. 한동안 내가 불평을 하고 다녔더니 어느 사람이 말했다. “좋게 생각해요. 그래도 이 시대에 일반인들에게 승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딘데요….” 피차 표현도 자유고, 생각도 자유인 세상에서 내 마음 불편해 해서 뭣하랴 생각하고 말았다.

며칠 전 누군가의 거의 강요수준의 추천으로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봤다. 내용이 불교적이라서 꼭 봐야 한다고 했다. 잔뜩 의구심을 품은 채. 영화를 다 보고 이게 정말 불교적 가치관과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보다 더 리얼한 그래픽은 최고의 수준급이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의 재판 이야기였다. 절에서 죽은 영혼을 위해 지내는 49재를 모티브로 제작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과 악, 죄와 벌, 그러고 보니 죄와 벌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왜 극단적인 양단을 좋아하고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늘 그 양단의 논리로 인해 큰 상처를 받으면서 말이다. 회상할 만큼 인생을 살지도 않았는데도 내게 요구 되어지는 일들이 너무 양극단점을 지향하는 것 같다. 반전에 반전을 더해가는 영화에 몰입하다가 보는 관점에 따라 죄악이 되기도 하고 찬탄받을 이유도 되는 것들을 가지고 우리들은 목숨을 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의 더위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에 노출되는 반도에 살아서인지 극단적일 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많은 일에서 주제는 잃어버리고 소재를 가지고 극단의 생각으로 치달리기도 하고, 몇 개의 작은 소품을 가지고 전체 주제를 희석시키려 시도하는 사람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다.

온 천하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데 동굴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따스하다고 자꾸 우기고 있지는 않을까? 한때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꽁꽁 얼려놓고 작은 촛불을 모아 겨우 온기를 살려온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듯 초췌한 모습을 보여 어떡하려는지 씁쓰레 맘 아프다. 정말 주제가 뭔지 뭐가 소재인지 분명히 성찰하면서 살아야겠다.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일러주셨다. 양변을 두고 아슬아슬 저울질하는 중용(中庸)이 아니다. 선도 악도, 죄도 벌도, 양변을 훨훨 벗어버리고 세상 어디에서나 본인이 선 그 자리가 중심이 되고 우주의 대주인공이 되기를 가르치셨다.

선을 버리면 악도 사라지는 것을. 이 계절 더위를 잊고 이제 차가운 겨울을 즐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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