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정치

2018.02.28 20:45 입력 2018.02.28 21:01 수정

[직설]미투의 정치

폭로에는 각자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그 목적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폭로라는 행위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용기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를 향해 발화된 이상 그 자체로 응답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이자, 사건이 된다.

미투(#MeToo)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그래서 틀렸다. 쏟아지는 폭로 중에는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거나, 오히려 명예훼손 등에 의해 반격을 당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럼에도 폭로를 결심하는 것은 이 비열한 폭력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 있는지를 자신의 아픈 기억으로 증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미 각계의 존경받던 남성 ‘어르신’들이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을 깔아뭉개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어르신들을 떠받들기 위해 충성경쟁을 벌이며, ‘작은 어르신’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도 보고 있다. 미투가 그려내고 있는 이 추악함의 지도는 그동안 우리가 영위하던 일상이 외면과 기만 속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처절하게 일깨운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나마 유지하고 싶다면 그 외면과 기만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미투 운동이 외치는 바처럼, 그런 시간은 끝났다(Time is up!).

여전히 정치적이라는 말을 ‘공작’이나 ‘불순한 의도’ 이외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은 미투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투를 통해 나오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증언들은 신의 존재나 학문적 진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과 사 모두에 퍼져 있는 젠더권력과 성차별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지독하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으로 ‘순결’하게 다루라는 요구는 폭로와 폭로자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성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사적인 비행이며, 그래서 정치로부터 유리된 것으로 여겨왔던 인식 때문이다.

덕분에 유능한데 ‘그 부분’만 조금 이상한, 훌륭한데 ‘그 부분’의 소문이 안 좋은, 성실한데 ‘그 부분’에서 실수를 조금 하는 사람들이, 그 유능함과 훌륭함과 성실함을 아무런 제재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소문이 돌고 꺼림칙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 사실을 확인하고 바로잡았다면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것도, 가해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괴물이 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입을 닫았고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넘겨왔다.

물론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성폭력을 저질렀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또 집중적으로 폭로가 벌어지는 분야들을 보면, 사람은 적고, 바닥은 좁으며, 폐쇄적이고 특수한 관행들이 많은 곳이다. 대부분의 성폭력이 관계와 권력을 빌미로 벌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만났을 때 가해가 발생할 개연성이 크다. 성폭력을 처벌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런 교묘함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어려움은 오롯이 생존자들과 그를 돕기 위해 선의를 갖고 나선 이들의 몫이었다. 이 험난한 과정 속에서 그들은 더 큰 상처를 입고, 순식간에 고갈되곤 했다. 법은 성범죄에 대해 엄벌주의적 관점을 견지해왔지만, 성폭력의 고리를 끊거나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미투의 증언 중에도 공소시효가 지나 법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애초에 몇몇 가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미투가 요구하는 답의 일부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와 침묵의 연대를 깨트리는 것이고, 성폭력을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될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모두 정치의 문제다. 폭로자들을 보호하고, 전략을 세우고, 협상하고, 관철시키는 그 모든 것이 정치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미투를 악용하는 음해세력이 걱정이면 쫓는 데 힘을 보태고, 엉뚱한 사람이 지목될까 걱정이면 바로잡으면 된다. 성폭력을 당할 리 없고 저지를 리 없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열함의 시간을 끝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다가올 시간은 그야말로 끝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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