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준 ‘개혁의 시간’은 길지 않다

2019.09.11 18:11 입력 2019.09.11 18:21 수정

빙하는 녹아내리고 아마존은 불탄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과학자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다.

[직설]촛불이 준 ‘개혁의 시간’은 길지 않다

현상의 이면에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극우 포퓰리즘 정권들이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기후변화 부정론까지 피력하며 환경규제와 국제협약을 폐기하고 있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정권은 아마존이 브라질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라며 아마존의 훼손을 방임했고 거대한 우림이 불타는 것마저 사실상 방조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극우 포퓰리즘 정권들은 환경규제 같은 ‘도덕적’ 허울을 벗어던지고 규제를 풀어서 경제성장을 하자는 구호를 공통적으로 외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동력이란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거대한 체념과 갈 곳을 잃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래를 불태우고 녹여서 얻는 이득마저도 소수가 독점하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소수가 될 수도 있다는 환영만이 잠시 눈앞에 펼쳐졌다가, 곧 이전보다 더 짙은 어둠만이 남게 된다.

민주주의는 도처에서 좌절하고 있다. 떠올려보면 2000년 이후 ○○혁명이라고 이름 붙은 대중들의 봉기가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다. 부패한 지도자들이 쫓겨난 곳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군부의 쿠데타, 독재세력의 귀환, 내전, 혁명동력의 상실과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 같은 비극적 결말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국가들에서 (준)독재가 회귀하고, 선진국이 앞장서는 자국우선주의가 국제질서를 야만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물론 지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신임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두고 일어난 권력투쟁 때문이다. 정부, 정당, 검찰, 언론 등이 뛰어들어 진흙탕 속에서 힘 싸움을 벌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우리 편과 너희 편이 격돌하고, 진실과 거짓이 아니라 그렇다더라와 아니라더라가 싸웠다. 각자가 자신만의 변하지 않을 정답을 품고 뛰어든 싸움이기에 해결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하나가 바닥을 보이면 다른 하나가 뒤질세라 바닥을 드러내고, 심도는 점점 깊어져만 갔다.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보통 사람들도 이 싸움에 당당히 한몫을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 속에서 자신만의 억울함을 발견했다. 그 억울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것들이 동원되었다. 공정성은 이미 익숙한 주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가 잊어버린 줄 알았던 학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과 계급이라는 개념까지 소환되었다. 하지만 이 잊혀진 개념들이 얼마나 힘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차피 대부분은 친조국과 반조국을 위해 동원된 것들일 뿐이니 말이다. 원래 이 개념들을 점유하고 있던 좌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희미해지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사회는 장고 끝에 더 “공정한” 선발과정과 더 줄 세우기 쉬운 점수체계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법을 발전시킬 공산이 크다. 조만간 누군가가 성적이 자기 예상과 다르게 나왔다며 학교를 고발하고 검찰이 전격 압수수색을 하는 일이 벌어져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우리는 20세기가 수많은 희생을 통해 남긴 그나마 유의미한 유산들에 차례차례 불을 지르면서, 새롭게 와야 할 것들의 목을 비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은 선명한 근거들을 갖추고, 우리를 무기력의 시간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우리가 촛불로부터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필요한 개혁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그것을 기반 삼아 촛불이 갖고 있던 한계마저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흔들리고 꺼져버리는 힘 없는 이들을 보호하기를 바란다. 역행하는 세계 속에서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길 바란다. 오랜 시간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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