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어둠

2018.04.25 21:13 입력 2018.04.25 21:26 수정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의 일이다. 백화점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일군의 무리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반도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통일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른바 NL 계열의 활동가들이었다. 전단을 나눠주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이들을 나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전단을 건넸을 때, 나는 통일비용 같은 것을 들먹이며 무턱대고 통일을 하면 어쩌자는 것이냐고 쏘아붙이고 말았다.

[직설]분단의 어둠

나이를 먹고 나서도 북한이나 통일 같은 이슈에 대한 내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는 두 버전의 통일이 있다. 하나는 북한을 붕괴시켜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보수의 통일론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협정과 연방제를 거쳐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진보의 통일론이다. 그리고 그 둘 중 어느 것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애초에 통일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느낄 때는 징집 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야 할 때 정도다. 그러나 통일이 되고나서도 화약고 같은 동아시아 정세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중론이니, 결국 그마저도 의미 없는 일이 된다.

여전히 실향민이나 이산가족들이 남아있다. 특히 북에 가족을 두고 탈북한 이들에게는 더 처절한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생인 나만 해도 통일 혹은 북한에 대한 의무감도, 부채의식도, 노스탤지어도 없다. 북 체제에 대한 선망도 증오도 이해하기 어렵고, 멀쩡한 가족들도 해체되는 마당에 서로 수십년간 다른 삶을 살아온 이산가족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북한이 남한의 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단과 북한의 존재가 남한 사회의 궁극적인 제약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령 국제관계에서 북한의 존재가 남한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단순히 북한의 군사행동을 견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북한을 직접 공격하는 옵션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도 남한의 몫이다. 이 좁은 땅에서는 북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남한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남한은 북한과 미국, 중국 사이의 관계에서 종속변수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팔아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 집단이 있다. 오랫동안 북한의 위협은 남한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전가의 보도였다. 독재도, 학살도, 마녀사냥과 기본권의 제한도 모두 북한의 위협으로 정당화되었다. 민주화가 되고 30년이 지났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들의 모든 사익 추구와 과오들을 북한의 위협으로 정당화하며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려 든다. 이 집단은 분단이 만들어내는 암흑에서 기원하는 무지, 공포, 불가항력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이 암흑이 계속되는 한 이들 역시 사라지지 않으며, 한국은 국가로서도, 민주주의로서도 온전할 수 없다.

정말이지 불쑥, 남북만이 아니라 미국까지 참여하는 정상회담과 평화협정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이 변화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불안이 전해져온다. 그들은 사람들의 불행과 역사의 슬픔에 기생하며 살아왔다.

북한이라는 거울에 비추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케인스가 경제의 온전한 발전을 위해 이자생활자의 질식사를 기원했던 것처럼, 이 반사이익자들 역시 평화의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시대의 요구다.

나는 여전히 민족에 대해 냉소적이다. 통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북한이 믿을 수 있는 협상 파트너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정상회담을 환영한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전쟁을 막는 것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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