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기업인들이 파업한다면

2018.04.30 20:16 입력 2018.04.30 23:01 수정

아인 랜드(1905~1982)가 1957년에 쓴 소설 <아틀라스>(휴머니스트)를 최근에야 읽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티파티 강경 보수들이 애독했다는 책이다. 스티브 잡스와 앨런 그린스펀이 아인 랜드를 추종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 때도 책은 회자됐다. 자유방임이나 기업지상주의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객관주의’를 주창한 랜드의 철학을 응축한 <아틀라스>는 보수의 ‘경전’으로도 꼽힌다.

[기자칼럼]문제적 기업인들이 파업한다면

소설에 얽힌 이야기는 워낙 많은데, 그중 하나가 금융지주회사 BB&T코퍼레이션이 2008년 미국 마셜대학 경영대학원에 100만달러를 기부하면서 이 소설을 정규 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기업 중심 이데올로기를 대학에 관철하려 한 사례다. 인류를 위해 하늘을 떠받치는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 같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려는 속셈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소설 속 영웅 존 콜트의 다음 대사에 잘 드러난다. “내 삶과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이성적·합리적 탐욕을 옹호하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부정한다. 평등이나 기회균등법, 공공복지를 저주한다. 소득세를 한 푼도 내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기업인 파업은 유명하다. 근미래 ‘민중국가’로 설정된 가상의 미국에서 독점규제와 복지 확대에 분노한 ‘혁신’ 기업인들과 이윤 추구를 맹신하는 학자 등등이 “거저 얻는 보상과 대가 없는 의무에 대항”해 파업을 선언하곤 콜로라도 골짜기로 숨어든다. 아틀란티스라 이름 붙인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일궈간다.

한국의 보수 이데올로그나 언론들은 재벌이 위기에 빠질 때나 기업 비판이 고조될 때면 ‘기업인들이 <아틀라스> 주인공들처럼 한국을 떠나면 어찌할 것인가’ 우려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청구 때도 <아틀라스> 이야기가 나왔다. 대한항공 수사가 재벌개혁 조치로 이어질 때도 아마 거론될 것이다.

그러려니 읽다 놀랐다. “기업인을 기생충처럼 여기는 노동자들”에서 벗어나 일군 아틀란티스는 자급자족 사회다. ‘아틀라스’들이 하인을 수십명씩 데리고 가 놀고먹을 줄 알았다. 하인은 없다. 다들 육체노동을 한다. 항공사 사장은 트랙터를 만들고, 전력 회사 대표는 신발을 생산한다. 판사는 버터를 내다 판다.이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며 돈을 ‘만든다’. 이들의 ‘make money’엔 불로소득 개념이 없다. 다만,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해 모인 자발적 결사체”에선 모든 것을 사야 할 뿐이다.

한국의 기업인과 보수는? <아틀라스>의 보수 이데올로기에 견줄 수 있을까. 비정규직 확대와 해고, 갑질과 억압·착취를 일삼는, 한국의 여러 기업가들은 “타인이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한다. 타인의 희생 위에 부를 축적한다. 이들은 “모든 것은 우리가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며 애덤 스미스가 비판한 ‘인류 지배자들’을 닮아 있다. 랜드의 ‘파업’이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건 한국엔 기득권이 취사선택한 논리만 득세한다.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한국의 문제적 기업인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그들이 ‘착취 대상’ 없이 ‘아틀란티스’로 간다면? 자급자족, 자기충족의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황제경영과 갑질, 편법·불법 경영, 무차별 해고의 주체로만 구성된 사회는 어떤 곳일까? 당신이 ‘문제의 기업인’이라면, 그곳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그 산물을 오로지 생산 가치로만 따져 거래하며 살 수 있는가? 당신과 비슷한 이들과 이기적 탐욕을 겨루며 살고 싶은가? 한국판 ‘아틀란티스’는 아인 랜드가 묘사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좀비가 아니라 인간끼리의 탐욕, 불신과 배반으로 파멸하고 마는, 미드 <워킹데드> 같은 인류 종말 영화의 무대와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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