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하는 산책

2024.06.11 20:47 입력 2024.06.11 20:48 수정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밤에 하는 산책’이다. 거주지가 학교 근방이라 보통 퇴근 후 교정이나 교내 원형운동장을 슬렁슬렁 걷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해넘이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닌다.

목적지 없이 걷다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섰던 밤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자동차 클랙슨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건물 처마 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 냄새와 알감자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옛날식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얼핏 보였다. 뚝배기에선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도마엔 채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옆 칸에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솔도 미솔도 미레 레도 도시라라. 유년기 여름날 동네 음악학원의 열린 창 너머로 흘러나오던 익숙한 ‘소녀의 기도’ 멜로디였다. <피아노 명곡집>에 수록되었던 이 곡은 과연 세대를 초월하여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명연습곡인가 보았다. 아니, 어쩌면 소년의 연주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상 공간 주변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집밥 내음과 피아노 소리가 있는 그 장면이 좋아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었다.

구시가지 아래까지 제법 멀리 내려갔던 또 다른 밤엔 골목을 걷다 아담한 교회 건물에 닿았다. 주일학교 여름 캠프 준비 중인지 평일 밤인데도 마당은 북적북적했다. 유치부원들이 색종이로 오려 붙인 듯한 벽면 글자들이 삐뚤빼뚤 사랑스러웠다. 학생 시절 다녔던 제기동성당의 여름 밤공기가 시간을 거슬러 얇은 원피스 자락 안으로 스미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산책길에 부러 그쪽을 경유했다. 교회 앞뜰이 복닥거리면 덩달아 마음 환해졌고, 불이 꺼져 있으면 괜히 아쉽기도 했다.

같은 골목 안엔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분식집이 있었다. 떡볶이와 주먹밥, 라면 등을 파는 데였다. 어느 토요일 저녁 교회 중고등부로 추정되는 학생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식전기도하는 모습을 그 분식집 통유리창 너머로 봤다. 다음 순간 이쪽으로 걸어오던, 교리교사로 보이는 청년들이 누군가를 험담하며 내 옆을 쓱 지나더니 가게로 들어서서 곧장 기도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뒷담화에서 신앙생활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순발력이란. 종교나 종파를 불문하고 신앙단체 언저리에 있어 본 사람에겐 낯설지 않을 그 장면에 피식 웃음이 났다.

모퉁이를 도니 국숫집이 하나 나왔다. 얼핏 보기에도 유서 깊은 고기국수 가게는 아닌 듯했고 예전 ‘팬시점’ 분위기로 아기자기하게 단장한 조그만 식당이었다. 지나칠 때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국물 맛이 끝내주거나 면발이 기가 막힐 것 같아서라기보단 여름밤에 찬 국수 한 그릇 하는 경험을 갖고 싶어서. 하지만 그쪽을 지날 즈음엔 대개 저녁밥을 먹은 뒤였다. 김밥 한 줄이면 배가 차는 나로서는 야참으로 국수까지 후루룩 해치우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하루는 밤 산책 도중 거기에 들르고자 늦도록 식사를 안 했다.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니 저쪽 테이블에서 초등학생 둘과 학원 마칠 시각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온 듯한 어머니가 카레 돈가스와 멸치국수를 나눠 먹고 있었다. 탁상 위의 스피커에선 루시드 폴의 노래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돼지 수육 조각 대신 채 썬 오이와 무절임과 삶은 달걀을 고명으로 올린 ‘육지식’ 비빔국수를 오랜만에 맛보았다.

다음주 지나면 종강이다. 급한 일들을 마치는 대로 섬 북쪽 마을의 밤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야겠다. 교회당 앞마당이 여름 캠프 준비로 북적이고 열린 창으로는 피아노 연습곡이 흘러나오는, 동네 치킨집의 닭 튀기는 내음이 고소하고 길모퉁이 가게에선 시원한 국수 말아주는. 이게 뭐라고 기대가 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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