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과 자연인 사이

2018.10.22 20:49
정지은 | 문화평론가

중학교 때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담임 선생님에게 매우 자랑스럽게 ‘샐러리맨’이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얘기를 하니 엄마는 당황했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아빠가 회사원인 게 좋다고 생각하는 딸의 반응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아빠가 양복에 넥타이 매고 나가는 모습이 좋았다. 책상 가득 서류와 장부를 펼쳐놓고, 안경을 걸친 아빠가 빨간색 노트에 뭔가를 적는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 ‘샐러리맨’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면서 그냥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직설]직장인과 자연인 사이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부터, 월급을 받지 않고 산 세월은 딱 한 달 남짓이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지낸 기간이 한 달이 좀 안 된다는 뜻이다. 희미했던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어서, 이제 곧 살아온 생의 절반이 바로 그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최은영의 소설 <한지와 영주>에는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주인공 영주가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역시 두려움의 노예로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했었다. 영주의 말대로 “이십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해야 할 시기였고, 여기서 치열함이란 죽기 살기로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경력을 쌓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경력을 위해 회사에 다니면서도 이력서를 쓰고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재미있는 일이고 사람들과도 잘 지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전 직장의 상사는 떠날 생각뿐인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늘 당당했고 상사에게도 아예 일종의 선전포고(?)를 했다. “난 계약직이잖아요. 선배도 계약직이고. 솔직히 말해서 선배가 날 정규직으로 만들어주지 않을 거잖아요. 전 여기 오래 안 있을 겁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이 일이 아니니까요. 다니는 동안에는 열심히 일하겠지만, 언제든 다른 갈 데 있으면 바로 갈 거니까 선배도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던 날, 회사에 헌신하던 상사의 표정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그 회사를 그만둔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 아예 새로운 시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곳을 떠나 일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잊을 만하면 들어오는 마약 같은 월급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말, 몇 년 만에 만난 분이 나에게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니 대단하다”고 말을 건넸다. 비슷한 조직에서 일하다 지금은 독립해서 일하고 있는 그분이 건넨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묶여있는 조직의 안정성 대신 독립을 선택하고 보폭을 넓힌 그분의 삶이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소속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소심한 것도 있지만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란 웹툰의 대사처럼 ‘어결치’(어차피 결론은 치킨집)로 수렴되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직장인이 아닌 나를 상상하기조차 힘들어진 지금, 빈곤한 상상력과 나날이 무거워지는 엉덩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졌어도, 한 발만 삐끗하면 궤도에서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여전하기에 더욱 그렇다. 지난 9월, “왜 하나의 일만 해야 하나요?”라고 물으며 시스템 밖에서 자신에게 맞는 룰을 찾아나가는 사람들을 만나 고민했던 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위한 삶을 찾기 위한 노력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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