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이 멋짐을 이길 수 있을까

2018.10.24 20:30 입력 2018.10.24 20:35 수정

개인적으로 평론가보다 창작자를 볼 때 더 멋있다고 느낀다. 물론 각자의 영역이 따로 있고 공생해야 함을 안다. 시장에서 외면받은 작품을 재조명하게 돕고 풍부하게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평론의 역할을 긍정하고, 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글을 쓰는 평론가들이 많다는 사실도 안다. 다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좋은 말씀’ 하시는 평론가보다 자기 존재를 내던지며 모험하는 창작자들을 볼 때 더 마음이 움직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직설]옳음이 멋짐을 이길 수 있을까

창작자의 고난과 극복의 서사를 밀착된 시선으로 보며 생생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그들이 출연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몰입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다. 특히 평소라면 함께할 일 없는 이들끼리 협업하며 새롭고 멋진 것을 만드는 순간은 짜릿하다. 그러다 나는 Mnet의 노예가 돼버렸고 올해도 <쇼미더머니 777>은 삶의 낙이다. 3회의 그룹대항전은 특히나 흥겨웠다. 이것에 대해 같이 떠들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흥분이 가시지 않는데 함께할 친구가 없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아 접속하고야 말았다.

‘개념글’을 쭉 훑었다. 못되고 거칠지만 그 덕에 웃음을 만들어 내는 글이 꽤 있었다. 그러나 혐오와 불쾌감을 유발하는 글들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출연자가 조선족이라며 조롱하는 글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한 선택과 행동은 놀릴 수 있지만(물론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만) 태어나며 얻은 정체성, 게다가 그게 약자의 것인데 그것만으로 당사자도 찾아볼 수 있는 공개적인 공간에서 조롱하는 일은 저열하다고 ‘느낀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신체적 조건에 대한 폄하와 조롱도 마찬가지다. 월경에 근거해 여성을 ‘피싸개’라 표현하고,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은어가 모든 부정적인 대상을 욕하는 데 쓰이는 게 그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좀 놀랐다. 그건 내게 구시대적 행태였다. 타고난 조건으로 인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욕망의 투사물로 전락하거나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이미 수도 없이 논증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온라인 게시판은 설명과 논증의 장이 아니다. 오직 확고하고 당당한 유희만 있을 뿐이다. 설득하려 들면 게임의 규칙을 깨는 게 된다. 어쩌면 집단적 응징이 따를지도 모른다. 발화자를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은 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타격감 넘치는 언어폭력을 내리꽂는 것. 소크라테스도 여기선 지혜 낳는 산파가 되지 못하고, 못생기고 헐벗은 놈이라 몰매 맞지 않을까?

힙합이라는 장르 특성 때문에 강화된 현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경우, 듣고 있으면 래퍼와 함께 ‘강해지는 느낌’ 때문에 힙합에 매혹됐다. 허리춤에 권총 꽂고 갱스터들과 어깨동무하는 느낌, 체제 저항적인 래퍼들의 거친 언어가 주는 쾌감에 취했다. 비트의 무드에 주목하고, 가사의 내용에 집중하고, 랩의 기술을 분석하는 등 시간이 가며 순차적으로 감상의 중점은 달라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멋지다는 느낌이었다.

시간 지나 ‘멋짐’에 대한 인식과 감각도 변했다. 이제 나는 대결에서 싸움을 걸어 끝내 이기는 사람보다 가능하면 다툼을 피하는 사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상대를 비웃기보다 스스로의 지식을 갱신하는 사람, 평화를 유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을 더 멋있다고 느낀다. 우위를 점하고 이를 과시하기보다, 우열을 나누지 않으려 노력하고 다른 이의 고통에 마음 쓰는 게 더 강한 것이라는 느낌도 갖는다. 감탄과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가까운 데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고, 그중 일부와는 친구가 됐다.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같은 좋은 말씀 들을 때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흘리기 쉽지만 친구들과 낄낄댈 때는 영혼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 느낌 아는 멋진 창작자가 더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힙합뿐만 아니라 웹소설, 게임, 예능, 상업영화 등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영역 전반에서 수용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동시에,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도 멋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서사와 화자가 더 풍부해지기를, 그로써 대중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를. 창작자의 영향력은 비평가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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