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2019.01.01 20:44 입력 2019.01.02 15:46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일본에 형사수용시설 및 피수용자 등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라는 현행법이 있다. 제215조는 천재지변이 일어나 피수용자가 위태로운 경우 해방시키라고 정하고 있다. “지진, 화재, 기타 재해가 일어난 때에 유치시설 안에 피난방법이 없다면 유치업무 관리자는 피유치자를 적절한 장소로 호송해야 한다. 호송할 수 없을 경우 이들을 유치시설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서구의 법을 가져다 베낀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생겨 수습하려 만든 것도 아니다.

[이범준의 저스티스]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1657년 3월에 지금 도쿄인 에도에 커다란 화재가 있었다. 건축물 60~70%가 소실되고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른 메이레키 대화재(明歷の大火)다. 1666년 런던 대화재와 함께 근대에 있었던 가장 큰 화재로 꼽힌다. 지금 도쿄 고덴마초에 있던 교도소도 불타고 있었는데 죄수를 풀어줄 이유나 근거가 없었다. 모두가 타 죽는 판에 죄수를 풀어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곳 책임자 이시데 요시후카는 죄수 120여명을 풀어주면서 불이 꺼지면 아사쿠사의 절로 돌아오라고 했다. 죄수들은 빠짐없이 돌아왔고 이것이 제215조를 만든 계기가 됐다.

기자는 지난해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인터뷰했다. 워싱턴으로 떠나면서 브라이어 대법관의 이름을 담은 도장을 하나 새겼다. 미국 연방대법원 200여년 역사에 아시아 언론과는 첫 인터뷰이기에 작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도장을 건네면서 브라이어 대법관에게 “한국에서도 도장을 쓰지 않지만 판사들은 판결문에 찍는다”고 말했다. 21세기 판사가 옥새와 비슷한 도장을 찍는다는 얘기에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서구 제도를 이식한 우리 사법제도에서 그나마 한국적인 것을 궁리한 게 도장이었다.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은 기자에게 존 마셜 대법원장 기념주화를 줬다. 존 마셜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헌법재판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만든 법률을 법원이 위헌으로 폐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에서이고 존 마셜 대법원장이 직접 판결문을 작성했다. 브라이어 대법관은 세계의 헌법재판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세계의 헌법재판을 취재한다는 기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집무실을 가득 채운 오래된 법서들이 브라이어 대법관이 미국 사법역사의 어디에 있는지 설명했다. 경외감이 들었다.

조규광 초대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별세했다. 지난해는 헌법재판소 개소 30주년이다. 역대 헌법재판관 가운데 세상을 떠난 사람은 셋이다. 이영모 전 재판관(재임 1997~2001), 변정수 전 재판관(1988~1994), 그리고 조규광 전 소장(1988~1994)이다. 나는 운이 좋아 세 사람을 모두 인터뷰했고 그 인연으로 이들 장례에서 모두 분향했다. 내가 우리 헌법재판소 역사를 기록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과 일본 최고재판소의 역사를 읽으면서다. 우리나라 사법기관 역사를 기록한 저술이 없었다. 결국 10년 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재판관들을 찾아다녔고,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재판관들과 만났다.

초기 헌법재판관들은 해보지 않은 헌법재판을 걱정하면서도, 일본을 거치지 않고 도입한 헌법재판에 흥분했다. 독일과 미국 사례를 연구하고 모방했다. 지금은 사라진 입법촉구를 비롯해 한정합헌, 한정위헌, 일부위헌, 헌법불합치 등을 도입했다. 이에 법원과 의회는 위헌 여부(與否)를 결정하라고 정한 헌법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헌법이론은 아직 유치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와 같은 훈계성 결정을 자주했다. 초대 재판관들은 법복도 직접 디자인하고 청사 외벽에 새길 무궁화도 재판관 숫자와 같은 9개로 정했다.

당시 비교적 무명이던 조규광 변호사가 왜 초대 소장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4선 국회의원 출신인 한병채 초대 재판관의 증언이 유일하다.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정기승 대법관, 헌재소장에 나 한병채를 내정해 두었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 인물인) 정기승이 국회에서 동의가 부결되면서 아차 싶었고 내가 자리를 포기했다. 내가 조규광 변호사를 추천했다. 노태우 대통령, 윤길중 민정당 대표, 당사자인 나 3명만 아는 극비사항”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조규광 전 헌재소장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상주를 모르는 상가에 가는 일은 어색하다. 보통은 상주가 고인을 설명하는데 이런 곳에서는 상주에게 나를 설명해야 한다. 대뜸 기자라고 하면 무슨 일인지 의심하고 걱정하는 눈빛이 된다. 그래서 조규광 전 헌재소장 상가에서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공현 전 재판관이 분향하고 상주에게 자신을 설명했다. 기자를 발견하고는 “초대 헌재소장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데……”라며 문상하라고 했다.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일본은 이시데 요시후카를, 미국은 존 마셜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우리는 조규광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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