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돌고 돌고 돌고

2019.02.27 20:43 입력 2019.02.27 20:51 수정

‘돌고 돌고 돌고’ 악보.

‘돌고 돌고 돌고’ 악보.

1987년, 올 것 같지 않았던 운명이 나에게 닥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다 기억해낼 수 있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이미 밴드가 흩어진 후이지만 들국화 멤버 전원에 대한 보사부 조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대마 사범으로 구속된 거다.

누가 내 주소를 알려준 것인지 나부터 집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두세 명이 더 구속됐는데, 들국화 멤버로는 허성욱과 나만 구속됐다. 발에 차는 족갑소리 쩔그렁거리는 조사대기실과 구타 분위기, 위험한 조서 꾸미기실.

[전인권의 내 인생]⑤돌고 돌고 돌고

“걔도 했잖아. 혼 좀 나볼래? 너희들은 어차피 5대 강력범 마약이야. 마약난동으로 조서 꾸미면 돼, 걔도 했지?” 다그치는 형사의 물음에 나는 “지금 이 협박 같은 당신들의 행동들, 모든 사실들을 여기서 나가면 연극으로 그대로 보여줄 거요”라고 응수했다. 엎치락뒤치락 큰소리. 그들의 공갈 협박이 이어졌다.

다행히 나의 공범으로는 자수와 다를 바 없이 자백한 친구 두어 명과 허성욱까지만 구속되었다. 착하디 착한 성욱이는 “같이한 적 없어요. 인권이 형 것 훔쳐서 나 혼자 몰래 했어요”라고 진술했다. 형사도 웃고 그때 친구들 모두 크게 웃었다. 그냥 같이한 적도 없고 나는 모른다, 이 한마디면 증거·증인 부족으로 풀려날 수 있었던 성욱이. 나는 ‘큰일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의 것을 탐낸다거나 거짓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구속된 후 나는 금보석(보석금을 내고 석방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럴 만한 사유가 내게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는 서대문구치소에 먼저 수감돼 있던 선배 수용자들이 알려줬다. 나는 4명이 함께 생활하는 혼거방에 있었다.

그해 겨울 서대문구치소는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로 이전하게 됐다. 내가 서대문 말기, 서울구치소 1기가 된 거다. 당시 운동시간에 만났던 시국사범들은 “의왕시에서는 우리 모두 독방을 쓴대”라면서 잔뜩 불안해했다.

아침녘에 구치소가 대규모 이동을 했다. 꽁꽁 묶어서 앉힌 다음, 그 앉은 자세로 걷게 했다. 대마 사범 중 누군가 “개고기를 안 먹는 건데 아 씨~~” 하며 투덜댔다. 나는 그놈에게 “대마초를 피워서 잡혔지, 개고기를 먹어서 잡혔니?”라고 했다. 그놈도 공범이었다

밥 대신 건빵을 줬지만 다들 설레 보이기도 했다. 나는 또 13명이 생활하는 혼거방에 배방됐다. 어느 날인가 운동을 다녀왔더니 <수호지>의 ‘무대’처럼 생긴 녀석이 베개를 드럼치듯이 마구 두드렸다. 그는 난동으로 잡혀온 도둑 전과자였다. 그 친구는 “드럼 이렇게 하는 거요? 나는 이번엔 도둑놈이 아니오. 첫 번째 난동전과인데 누범이라…”라고 말했다. 가만 보니 도둑질 외엔 할 게 없을 것 같은, 아주 작고 깡마른 친구다. 중앙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다가 난동으로 잡혀왔다는 이 녀석이 자랑을 했다. “내가 도둑질만큼은 최고요. 도둑질도 프로가 해야지, 도둑질 잘못하면 강도가 되는 거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관심이 쏠렸다.

운명이라는 것. 나는 이놈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야, 너 진짜 도둑질은 프로냐? 만약 내가 주소 하나 알려주면 너 진짜 훔쳐서 가져갈 수 있냐?”라고 물었더니, 그놈은 얼굴까지 환해지며 “전인권 형 집 악기들 훔치는 거요? 누워서 떡 먹기요”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이 삼청동 높은 곳에 있어, 도둑질한 물건을 갖고 내려오는 것도 힘들 거라고 같은 방에 있던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고 “좋다. 우리 집에서 도둑질을 해가면 네가 이긴 걸로 해줄게. 해볼래?”라고 했다. 그러자 그놈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좋아요. 밤에는 아무도 없다는 얘기죠? 자물통은 안 부숴요. 내가 나가는 대로 훔쳐가겠소. 주소를 줘요.” 나는 주소를 알려줬다. 기분이 묘했다. 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도둑놈에게 연민을 느꼈다.

나는 이놈에게 정인봉 변호사도 선임해주고 면회도 갔다. 그는 면회할 때 어쩔 줄 몰라하며 어색해했다. 마음이 찡했다. 태어나서 면회라는 것을 처음 해본다고 했다. 기가 막힌 놈…. 결국 놈이 이겼다. 놈은 출소 후 내 집에서 돈 되는 악기와 음악 기자재들을 모조리 털어갔다.

잠결에 누군가 내 수감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빨리 일어나! 나가요! 와~ 금보석 걸린 거요. 옷은 뭐하러 입어? 그냥 나가면 되지.” 옷을 입으려는 내게 흥분을 하며 야단치듯 내가 나가는 걸 축하해준 놈. 운명, 서로 다르게 같은 시간 속에서 세상은 돌고 돌고…. 그 후 ‘돌고 돌고 돌고’는 빅히트를 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