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와 헝거, 그리고 의지와 기적

2019.03.07 20:38 입력 2019.03.07 20:47 수정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보는 내내 스티브 매퀸의 <헝거(Hunger)>를 떠올렸다. 한자어로 이뤄진 한글과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영어는 실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우연의 일치로, 항거와 헝거. 모음의 크기가 달라져 일종의 변주처럼 느껴졌을 뿐. 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항거>를 보며 <헝거>를 떠올리는 게 결코 억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항거>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헝거>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외쳤던 바비 샌즈가 영국의 메이즈 왕립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감옥이 배경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옥중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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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스빈더가 주연을 맡았던 <헝거>는 인간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비 샌즈는 죄수복 착용과 샤워를 거부하며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에게 양심수로서의 지위를 요구한다. 앞선 요구가 무시되자 바비 샌즈는 단식투쟁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는 이내, 단식으로 인해 사망한다. 왕립 교도소에서 아사라니, 최후엔 그를 살리고자 수액주사까지 동원하지만 불가능했다. 그의 최종 사인은 심장마비, 심장을 뛰게 할 최소한의 에너지까지 말려버린 채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죽을 때까지 음식을 거부할 수 있을까?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것으로, 게다가, ‘양심수’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을 얻고자 몸이 갈구하고,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먹는 것은 생물이 갖는 최소한의 요구이자 욕구이다. 그 최소한의 욕구를 스스로 단속하며 이내 목숨까지 내놓는 바비 샌즈를 보며, 나는 과연 인간의 ‘의지’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이 구분될 수 있는 어떤 임계점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몸을 파괴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추상적 가치와 이상, 그건 인간에게만 있는 것 아닐까?

유관순 이야기 <항거> 역시 ‘의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관순은 세 평도 안되는 서대문 감옥 8호실에 스물 네 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감방 문이 열리자마자 수감자 24명이 선 채로 새로운 수감자를 바라본다. 한꺼번에 누울 수도 없는 좁은 방, 그들은 순서를 나누어 돌아가며 몇 명씩 앉고, 서 있는 사람들은 원형을 그리며 좁은 방안을 맴돈다. 서 있기만 하면 다리가 퉁퉁 부어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곳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일부러 굴욕감과 불편함을 주기 위해 기획된 감금소이다.

3·1 만세운동 이후 대부분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의 이런 비인간적 처우는 어쩌면 그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자존심을 뺏고자 하는 술수였을지도 모르겠다. 도를 넘어선 불편은 굴욕을 목적으로 한다. 벽관, 족쇄를 찬 독방, 잔인한 고문들은 우선은 신체적 불편을 야기하지만 마침내 노리는 것은 인간적 존엄에 대한 파괴일 테다. 먹을 것을 줄이는 식의 생물학적인 가해가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자 자행되었던 고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중요한 것은 <항거>의 유관순이 그리고 그들이, 그럴수록 더욱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불태웠다는 점이다. 먹고, 마시고, 싸는 동물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시고, 싸는 게 아니었기에. 몸이 불편하더라도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더라도 얻고 싶은 것, 자유 그리고 나의 나라가 있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그것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유관순이 감방에서 거듭 신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듯이 국가, 나의 나라 역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보이지 않지만 신을 믿듯이 곁에 느껴지지 않지만 나라는 있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처럼,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은 것이며, 님은 부재하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것일 뿐이다. 신이 존재하지만 침묵하듯이 나의 조국, 나라 역시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

그러므로 한용운의 또 다른 시 ‘알 수 없어요’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대단한 절창임에 틀림없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도,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도,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도, 타는 저녁놀도 우리는 어찌 그런 놀라운 광경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아름답고 대단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신의 손길이기에 감히 인간이 따라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일은, 그것만은 사람의 일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죽은 나무를 살리는 것이며 시간을 거꾸로 돌이키는 것이다. 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니 우리는 그런 일을 가리켜 ‘기적’이라 부른다. 그리고 때론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희망’이라 부르기도 한다.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것 그것이 기적이며 의지이다. 사라진 나라를 보며, 지켜내는 희망, 거기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거는 기적, 그 기적의 실체가 바로 인간의 의지임을, 다시 <항거>를 보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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