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의 출현을 기다리는 심리

2019.04.03 21:10 입력 2019.04.03 21:16 수정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때는 연산군 6년(1500), 도적의 우두머리 홍길동이 충청도 전역을 무대로 날뛰었다고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영의정 한치형은 현지 사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역사와 현실]홍길동의 출현을 기다리는 심리

“강도 홍길동은 첨지 벼슬을 사칭하며 고위 관리의 복장을 하였습니다. 머리에는 옥으로 된 관자를 붙이고, 붉은 허리띠를 허리에 둘렀습니다. 그는 대낮에도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린 채 관청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마음껏 물건을 가져가고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관가에 고발하거나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백주 대낮에 홍길동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보란 듯이 관청에 들어가 재물을 탈취하였다. 충청도 일대의 관리들은 그런 그에게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홍길동을 마치 상관처럼 모시고 받들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조정은 한동안 손을 쓰지 못하였다. 홍길동의 세력은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조정은 깊은 시름에 빠졌고, 비밀리에 여러 가지 수단이 강구되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강도 홍길동”이 연산군 6년 10월, 관헌에 체포되었다. 상당 기간 엄한 취조가 진행된 것은 물론이었다. 조사 후 홍길동과 그 부하들은 법대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취조 과정에서 한 가지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무관으로 고위직에 있던 엄귀손이 홍길동 일당의 뒤를 봐주었다는 것이다. 홍길동은 엄귀손이 사실상의 우두머리라고 자백하였다. 이는 일파만파가 되었다.

요샛말로 엄귀손의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안 가서 엄귀손의 비리 사실이 전모를 드러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부정축재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엄귀손은 본래 가난한 무사였으나, 온갖 수단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았다. 서울과 지방에 화려한 집을 마련했고, 4000석가량 되는 곡식을 창고에 쌓아둔 벼락부자가 되어 있었다. 엄귀손은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전 재산은 몰수되었다.

홍길동을 처형한 뒤 충청도 일대에 거센 후폭풍이 불었다. 조정은 사건의 관련자들을 낱낱이 체포해 평안도를 비롯한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때문에 평안도 일대에는 아직까지도 충청도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 민족시인으로 손꼽힌 김소월도 공주 김씨다. 오산학교가 있는 정주지방에서는 홍주(홍성) 김씨가 이름을 날렸다.

사건이 종결되고 10여년이 지나도록 충청도 일대는 민심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 많은 백성들은 조정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이웃한 전라도와 경기도로 떠나버렸다. 그 바람에 충청도에서는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심지어 토지조사(양전)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충청도 사람들에게 홍길동이란 이름은 저주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홍길동의 형적은 물론 이름까지도 망각의 땅에 깊이 파묻었다. 시간이 흐르자 홍길동이란 이름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홍길동 사건의 여파로 고향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홍길동의 전설을 되뇌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홍길동을 평안도와 황해도(서도)에서 악명을 날린 도적이라고 하였다(<성호사설>). 누구보다 탁월한 역사가였던 이익조차 홍길동의 활동무대가 충청도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기억이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한국의 민중이 도적 홍길동을 그들의 영웅으로 되살려낸 것은 19세기 무렵이었다. 옛 소설 <홍길동전>이 대표적이다. 오래전부터 국문학계에서는 이 소설의 저자를 허균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19세기 민중의 집단창작이다. 그것이 한국사회에 등장한 것도 허균이 죽고 나서 200년쯤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알다시피 <홍길동전>은 주인공을 폭정에서 민중을 구하는 의로운 영웅으로 묘사한다. 의적 활빈당을 이끌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탐관오리를 엄벌하는 홍길동은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다. 19세기 말 여러 곳에서 암약하던 도적들조차 스스로를 활빈당이라 자처했을 정도로 홍길동의 인기가 높았다.

오랜 세월 동안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홍길동, 조선 후기의 민중은 바로 그 홍길동을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추모하였다. 출구가 막힌 현실의 우울함을 이겨내고 싶은 민중의 바람이 새로운 홍길동을 만들어냈다.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희망이요,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홍길동 같은 영웅이 불쑥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의 삶이 한꺼번에 바뀔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그런 심리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심리상태를 스스로 청산할 때가 되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뀐다고 바뀔 만큼 세상이 만만하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짐을 진 채, 묵묵히 앞길을 헤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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