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지지 않은 약속

2019.04.08 20:51 입력 2019.04.09 09:54 수정

[박래군 칼럼]지켜지지 않은 약속

강원도 산불을 대하는 태도는 신속했고, 긴밀했고, 단호했다. 그런 덕분에 더 큰 재앙으로 번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다른 정부의 재난 대응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에 비해서 제1야당은 구태를 버리지 않고 이마저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해서 비난을 받는다.

[박래군 칼럼]지켜지지 않은 약속

모든 일을 이렇게 했으면 대통령도 여당도 지지율이 급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일은 지지부진하다. 촛불시민들이 원했고, 이 정부 스스로 약속했던 정부의 모습을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4월1일은 만우절이었다. 그날 청와대에 초청받아서 갔다.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집행책임자들이 초청 대상이었다. 80명의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그 자리에 갔는데 이 정부 들어서 처음이고, 노무현 정부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대통령과 정부는 이전부터 대화를 갖자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개별적인 사안을 두고 말을 듣는 것 같았으나 정책으로 이행되지는 않은 채 시민사회가 바라던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물론 시민사회가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현장 가까이서 정책의 실효성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경청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정부의 대화 태도는 듣기는 하되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인사들은 정부에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각계를 대표하는 16명의 인사들이 발언을 이어갔다. 그들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부가 잘못하고 있으니 제대로 하라는 따끔한 말들이었다. 한 시간도 더 넘게 진행된 발언을 다 들은 대통령이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동반자 관계라고 말했다. 절반의 책임을 나누자는 것처럼 들렸다. 누구도 박수치지 않았다.

청와대를 다녀온 뒤로 찜찜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에 경남 지역 두 곳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진행됐다. 창원성산 투표구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단일후보를 냈음에도 신승했다. 겨우 504표. 통영·고성 투표구에서는 자유한국당에 내줬다. 성적표로만 보면 1 대 1일 수 있지만, 정부와 여당에 대한 실망감이 표로 나타났다는 해석이 강했다. 그러니 여당은 즉각 민심이 무섭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곧 다른 이야기가 들렸다. 낙선은 했으나, 이전 선거보다 지지율이 올랐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고 한 장관 후보자는 청와대가 철회를 했는데도 인사검증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뻗댄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초기의 경청하는 자세에서 불통으로 가려는 것인가? 한다고 하는 대화는 대부분 이벤트이거나 형식적이다.

이 정권은 종종 촛불정권이라고 말한다. 촛불항쟁 덕분에 탄생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정권이라면, 촛불집회 중에 창원에서 24살 전기공이 했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제 삶이 나아질 기회가 있을까요?…이대로 20년, 30년 살라고 하면 못살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해놓고는 곧이어 인상효과를 무력화하는 정책을 단행하고, 52시간 근로제를 도입한다고 해놓고는 탄력근로제를 도입한다고 하면서 노조도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하는 정책을 강행하려고 한다. ILO 핵심협약을 도입하지 않으면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이 벌어질 지경인데, 경영계의 요구를 수용해서 노동권과 경영방어권을 일괄 타결하겠다는 말도 들린다. 갈지자도 이런 갈지자가 없다. 교수나 전문가들 말은 경청할지 몰라도 현장의 목소리는 적대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래 놓고 노동존중사회니, 포용국가니 하니 이건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광장에서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요구했다. 그중에는 재벌개혁도 핵심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재벌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런 결과는 경사노위에서 말도 안되는 경영방어권을 주장하는 경영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책 <사람이 먼저다>에서 “우리나라는 노동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반면, 사업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하기 때문에 부당노동행위가 끊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고 했다. 그런 인식이 집권 2년 만에 180도 바뀌었다.

적폐청산 작업도 소리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청산된 것이 무엇인지 답답하다. 절차와 요건을 문제 삼으면서 미적대는 동안 골든타임은 지나가 버리고 과거 정권에 기생했던 관료들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집권 초기에 한 관료가 그랬다고 한다. “2년이 지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이제 다음달이면 집권 2년이다. 형식적인 대화니 동반자적 관계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어디까지 왔는지 허심탄회하게 점검할 수는 없을까? 정부 부처마다 만들어졌던 적폐청산 기구들의 보고서는 제대로 공개되지도 않았고, 이행되지도 않았다. 촛불정부라면, 촛불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앞의 책 첫머리에는 “사람 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부자의 편, 기득권 세력의 편이 되는 정권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던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권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 안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점점 배제되고 있는 듯하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던 대통령의 말을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야 하는가. 믿고 기다린 결과가 배신으로 흐를까 두렵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