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을 먹는 사람들

2019.09.20 20:43 입력 2019.09.20 20:48 수정

세탁기에서 막 꺼낸 빨래를 널다가 티셔츠 하나를 손에 들고 잠깐 주춤했다. 거기에는 다른 빨랫감과는 다른 향이 있다. 휴가지의 냄새. 무려 반년도 더 전에 다녀온 여행인데, 그때 공유주택에 비치되어 있던 섬유유연제의 향기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오고, 여유롭고 느긋했던 휴가가 떠오르다보니 코를 박고 킁킁대고 싶은 행복의 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냄새다. 반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향이라니, 이 비밀은 바로 섬유에 남아 있는 미세플라스틱이다. 아마도 나는 모르는 말만 써 있다는 핑계로, 공짜라는 핑계로 하수구에 플라스틱을 들이부었나보다.

[시선]플라스틱을 먹는 사람들

어제 카페에서 음료를 시킬 때 빨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플라스틱은 안 쓰겠다 생각도 하고 실천도 잘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은 종종 존재 자체를 잊는다. 화장품이나 섬유유연제처럼 액체 속에 들어간 플라스틱은 정말 신경 쓰지 않으면 잊고 살기 십상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쓴 플라스틱이 이만큼, 정말 몰라서 혹은 깜빡 잊어서 쓴 플라스틱이 또 이만큼 쌓여 우리는 어느새 일주일에 카드 한 장만큼의 플라스틱을 먹는다.

일년간 한 사람이 평균 사용하는 일회용 컵이 500개가 넘는다는데, 늘어놓으면 작은 방바닥 하나쯤은 너끈히 채울 정도의 양이다. 플라스틱이 썩기까지 몇 백년은 걸린다는데 한 사람이 일회용품을 이만큼씩 쓰고 있다니, 그것도 오로지 컵 사용량이 그만큼이다. 야채나 과일이 담겨 있는 팩, 아이들 장난감, 폐어구까지 생각하자면 다이내믹코리아의 다른 말은 플라스틱코리아가 아닌가 싶어진다.

특히 5㎜ 이하의 미세플라스틱은 크기가 워낙 작아 정화장치에서 걸러지지도 않는다. 1차 미세플라스틱은 세제나 화장품의 원료로 쓰였다가 하수구를 거쳐 바다로 오기도 하고,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알갱이 형태로 유출되거나 혹은 합성섬유 제품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로 흘러오게 된다. 2차 미세플라스틱은 육지에서 사용한 큰 플라스틱 제품이 햇빛이나 바람에 의해 작게 쪼개어지면서 생긴다. 이렇게 하나둘씩 바다로 모인 작디작은 플라스틱들은 어느샌가 해양생태계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버렸다. 해양생물들은 바다를 떠도는 플라스틱을 먹이로 오해하고 집어삼킨다. 그 생물을 또 상위 포식자가 잡아먹기를 반복하고 결국 플라스틱은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온다. 게다가 우리의 조리법은 또 얼마나 식재료를 다채롭고 알뜰하게 사용하는지, 매운탕을 끓여먹어도 생선 내장을 듬뿍 넣어 고소하고 시원한 맛을 내고, 게를 쪄먹어도 내장을 싹싹 긁어먹고 밥을 넣어 비벼먹으며, 아예 내장만 모아다가 소금에 절여 젓갈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몸에도 플라스틱이 쌓인다. 사람들이 평균 한 달에 칫솔 한 개 분량의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있다는 경고성 연구결과를 낸 세계자연기금(WWF)도 아마 우리가 이렇게 생선 내장을 먹을지는 몰랐을 거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걸러낼 수도 없는 미세플라스틱을 어쩌면 좋을까. 아직 유해성 연구가 많이 부족하니 ‘체내 플라스틱 농도는 얼마인데 이게 더 높아지면 어떤 문제가 있다’라고 과학교과서에서 배울 날까지 그저 손 놓고 기다려도 되는 것일까.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한 케냐, 플라스틱 빨대와 스티로폼도 금지한 발리, 플라스틱 컵과 접시까지 금지한 프랑스처럼 곳곳에서 강력한 법적 조치를 시작하고 있다. 꼭 규제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제 삶의 방식을 전환해볼 때다. 세계 어디보다 유행에 앞서고 변화의 흐름을 빠르게 읽어내는 대한민국의 힘이 여기에도 작동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예쁜 쓰레기는 이제 그만. 쓰고 버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트렌디하지 않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사용한 손때가 묻어 있어야 힙하다. 플라스틱 대신, 씻고 말리고 깁고 다듬는 과정에서 오는 충만한 돌봄의 기운이 우리의 몸에 쌓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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