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서점

2019.11.17 21:08 입력 2019.11.17 21:09 수정

오래전에 살았던 집 앞을 지나가볼 기회가 생겼다.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그 집들을 일일이 다 추억하지는 않는다. 기억은 하지만 딱히 추억할 만한 일이 없는 집들도 많다. 해외에서 살았던 집들은 다르다. 짧게 살았거나 길게 살았거나 그 집들을 떠날 때마다 내 평생 이제 여기 다시 와볼 일은 없겠구나 싶어져서 한참 동안 그 집을 쳐다보곤 했었다.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좋은 서점

2000년대 초반에 베이징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최근에 그 집 앞을 다시 가보게 되었다.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뀐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집의 위치조차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집이 이제 집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 열배쯤 올랐다고 동행을 했던 중국인 친구가 말해주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때도 내 집이 아니었으면서도 괜히 속이 쓰렸다.

그 집에 살 때 서점에 자주 다녔다. 내 중국어 실력이란 게 중국책을 줄줄 읽을 만한 게 아니었음에도 책을 몇 권씩 사곤 했다. 환율이 좋고 물가도 아주 쌌던 시절이다. 한국에서 책 한 권 살 값으로 몇 권을 살 수 있으니 읽을 수 있든 없든 무조건 사고보았다. 그렇게 사놓고는 표지와 목차만 본 책들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그 책들을 통해 중국을 조금이나마 더 배웠던 것이 사실이다. 주로 역사 이야기들이 재미있었고, 특히나 명나라 청나라의 역사가 흥미로웠다. 서구열강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시기의 고통스러운 역사는 내 나라의 참혹했던 역사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유적지들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톈안먼 광장 동쪽으로 나 있는 동교민항은 그중 가장 참혹한 유적지의 하나로 각국의 영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당시 중국은 그 서구열강들에 의해 갈가리 찢겼었다.

유적지들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안고 있거나 아니거나 그 역사의 교훈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새롭게 단장된다. 동시에 그 유적지들을 중심으로 매우 현대적인 삶이 퍼져 나가기도 한다. 관광객들은 그 자리로 몰려든다. 동교민항, 또 톈안먼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 큰 서점이 눈에 띄었다. 베이징의 대표적인 유적 중의 하나인 전문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4층짜리 서점이다. 위치도 그렇거니와 내부의 서가가 예사롭지 않다. 전부 지상으로만 되어 있는 이 서점은 책과 함께 서점 바깥의 풍경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서점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놀랍고, 그 햇살과 책과 함께 있는 식물들도 놀랍다. 당연히 카페도 있고, 책 읽기 좋은 소파도 있다. 서점에서 눈부신 햇살을 만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을을 누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나, 햇살이 너무 좋아 책 읽기는 그른 계절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책도 보고 햇살도 볼 수 있다면, 책 읽다가 잠깐 햇살과 경치에도 눈을 팔 수 있다면 그게 더 즐거운 일일 것임은 분명하다. 아름다운 서점은 독서애호가들만 불러 모으는 게 아니라 책을 구경하고 서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더 많을 것이다. 오래전의 종로서적이 떠오른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누구나 선호하는 약속장소이기도 했었다.

아름다운 서점은 보기에 좋지만, 동시에 논쟁거리가 없지 않다. 서점의 주인이어야 할 책조차 그 아름다움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서점의 매대에 깔리는 책들은 그 시기에 가장 이슈가 되는 책, 말하자면 눈길을 끄는 책들이다. 이슈에서 이미 배제가 된 책은 이 서점에 진출할 기회가 아예 없을 것이다. 독서애호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책이 있는 서점을 찾아가겠으나 책구경을 통해 어쩌면 독서애호가가 될지도 모를 관광객들로 말하자면 아예 망외의 책들은 만날 기회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책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서점은 베이징에 있기는 하지만 중국 서점은 아니고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다. 정작 싱가포르에서는 문을 닫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을 일으키는 책을 매대에서 빼버려 문제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주로 판매하는 책들도 외서들이다.

책들은 세월이 흘러도 열배는커녕 두 배로도 값이 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무르익는다. 오래전에 베이징에서 살 때 내가 읽었던 책들, 서가를 어찌나 빼곡하게 채워놨는지 잘 뽑히지도 않았던 책들을 사면서 내가 느꼈던 기쁨은 서점의 아름다움과는 상관이 없다. 서점까지 아름다웠다면 한 번 갈 걸 두 번 갔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겠다. 그런 서점에 잘 팔리는 책들 말고 좋은 책들이 매대에 잘 깔려 있었다면 한 번 갈 걸 세 번 가기도 했을 것이다. 글을 쓰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조차도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서점의 한복판에 망연히 서 있게 될 때, 내 주변에 있는 책들이 그 책의 이슈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들이라는 걸 믿을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서점은 분명 책을 파는 곳이지만 동시에 책만 파는 곳은 아니어야 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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