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는 것도 사치라…

2019.12.27 20:38 입력 2019.12.27 23:03 수정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은 왜 하필,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왔을까? 신은 왜 하필, 강한 힘을 가진 어른이 아닌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태어났을까? 신은 왜 하필, 주류 권력자가 아닌 이방인 노동자의 몸으로 살게 되었을까? 예수의 탄생과 인생은 내게 기쁨이자, 역설이다.

[시선]앓는 것도 사치라…

신이 ‘몸’으로 이 땅에 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엄마가 젖을 물려주면 사력을 다해 빨다가 스르륵 잠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아기의 몸, 세상을 향해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며 뛰노는 게 전부인 소년의 몸, 노동으로 단련되어 단단하고 땀내 절은 어른의 몸, ‘먹보에 술꾼’으로 불릴 정도로 향유하는 몸, 마침내 온몸에 상처를 가득 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몸. 신은 그렇게 겸손하게 우리에게 왔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겸손을 배우지 못한 채 자신의 연륜과 권력을 면류관과 채찍으로 삼는다. 어느 지식인은 ‘너의 젊음’이 ‘늙은 나’의 공로임을 알라고 쩌렁쩌렁 윽박지른다. 권력을 움켜쥔 이들은 노동하는 몸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야만스럽게 자신들의 탐욕을 채운다. 누군가는 자신과 다른 몸과 성적 지향을 가졌다고 낙인찍고 혐오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몸은 가졌으나, 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껍데기와 같은 존재들이 인간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의 기세가 등등한 세상에서 신이 아기였고, 노동자였고, 여성과 장애인과 이방인 등 소외되고 압제당하는 이들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오랜만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식을 남긴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다시, 길 위에 서 있었다. 자신도 항암 치료를 받고 있지만, 해고된 노동자의 전원 복직을 위해 180일 넘게 영남대 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인 친구, 박문진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로 걷는다 했다. 항암 후유증, 약물 부작용,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고통을 ‘풀옵션’으로 앓게 되어 쉬면서 지난 세월 동안 스스로 ‘학대한 몸’을 달래려 한 그가 다른 학대당하는 몸을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친구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그에게는 ‘앓는 것도 사치’였다.

어디 그뿐일까. 톨게이트, 철탑 위, 옥상에 위태롭게 놓인 몸들과 출근 후 퇴근을 영영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몸들을 두고서는 앓는 것도 사치이고, 평안은 이생과 무관한 일이 되어버렸다.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의 비극을 그린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인 리키와 애비처럼 열심히 살수록 불행하고, 아프면 그만큼 빚이 청구되기에 쉴 수도 없는 몸들이 여기저기서 끙끙대며 속울음을 운다. ‘늙은 나’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너의 젊음’은 끊임없이 착취와 모욕을 당한다. 어떤 몸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이런 세상에서 신이 인간으로 존재했다는 것, 해마다 소란스럽게 아기의 몸으로 오신 예수를 기념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내게 신은 상상 속의 몸이 아니라, 실존하는 구체적 몸이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신을 본다. 박문진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고 싶은 희망을 잃지 않는 김진숙과 그의 곁에서 함께 걷는 친구들을 통해, 철탑 위 노동자를 축복하는 순례자들을 통해, 함께 살기 위해 뭐라도 하자고 자신이 어디에 후원하는지 공유하며 후원을 독려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친구들을 통해 인간으로 오신 신을 만난다.

2019년을 보내며 적은 금액이지만 후원할 곳을 늘렸다. 대안 언론 운동, 성소수자 편에 서는 인권 운동, 일하다 죽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운동 등 세상은 넓고 연대할 곳은 많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덜 미안할 수 있고, 수많은 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방편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감히 부탁한다. 2020년에는 타인과 연결되고 연대하는 몸이 되어주시라.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히브리서 13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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