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기후야, 바보야!

2019.12.27 20:36 입력 2019.12.27 21:41 수정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성탄절 메시지에서 청소년 기후변화 활동가들을 칭찬했다는 외신보도가 나왔다. 여왕은 “오늘날의 도전은 우리 세대가 겪은 것과 다르다. 하지만 요즘 기후, 환경보호와 같은 이슈로 신세대들이 예전과 비슷한 목적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데 감명받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왕은 작년 2월에는 다큐멘터리 <푸른 지구 2>를 보고 충격을 받아 왕궁과 왕실의 영지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중단시켰다.

[세상읽기]문제는 기후야, 바보야!

올해는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 한 획을 그은 해이다. ‘기후행동(Climate Strike)’은 콜린스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다. 작년 8월부터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그레타 툰베리는 타임지가 뽑은 올해의 인물이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유엔기후행동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툰베리는 “당신들은 우리의 미래를 훔쳐 가고 있다”고 사자후를 토했고, 같은 기간 전 세계에서 열린 기후시위에는 700만명이 참여해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으로 기록됐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지난 5월부터 기후변화를 기후위기 혹은 기후붕괴로, 지구온난화를 지구가열화로 바꿔 표기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는 지구인을 공포와 혼란으로 몰아넣는 디스토피아 시나리오가 아니다. 사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되, 이를 환경뿐 아니라 사회정의까지 고려하는 좀 더 나은 세계로 만들어가자는 제안이다. 환경파괴와 실업, 양극화로 고통받는 세계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새로운 문명을 향한 꿈이다. 경제체제를 바꿔야 하고, 이를 실천하는 정치세력이 필요하며, 그런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자각이 요청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에너지전환, 경제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의 은어로 “찐”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기후정상회의에 참가했으나 이 회의는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2050년까지 어떻게 탄소배출제로계획을 이행할 것인지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둘러싼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문 대통령의 기후 관련 발언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미세먼지 저감대책에 그쳤다.

이런 정부의 인식은 계속 엇박자를 낳는다. 내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보면 생태전환의 장기전략은 어디에도 없고(경향신문 12월23일자 ‘정태인의 경제시평’),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내놓은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는 기후위기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1인당 국민소득 6만5000달러를 목표로 삼고 있다(경향신문 12월21일자 홍기빈의 ‘세상읽기’). ‘무한히 성장하는 경제’를 정부정책의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진보는 보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후대응에는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방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이후 미국 200여개 도시는 기후동맹을 맺고 협약준수를 다짐했다. 서울시 역시 해외 선진도시들의 사례에 관심을 갖고 생태적 전환을 수 차례 선언했다. 그러나 사상 최대라는 내년 예산안에서는 가장 큰 에너지 소비원인 건물에너지 효율화 사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등 기후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서울 녹색당의 분석이다.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기후위기라는 이슈가 먹혀들지 않을까. 지독한 성장중독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모두 불행하고 미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1992년 빌 클린턴의 대선공약이었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맹신하고 있다. 말로는 국민행복을 말하지만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자연, 공동체와의 관계회복이 아니라 여전히 돈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분배구조가 점점 나빠지니 돈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길이 없다.

한국에서 “문제는 기후야, 바보야!”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진보진영의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다. 적폐 청산과 권력구조 개편도 중요하지만, 젊은 세대와 발맞춰 미래의 가치와 청사진을 보여주는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 정부의 구호인 공정과 혁신은 생태적 가치와 함께 추구됨으로써 비로소 그 지향이 완성된다. 공정은 기득권의 틀을 바꿀 때 가능하며 혁신은 목적이 있어야 추진력을 얻기 때문이다.

2020년 우리를 기다리는 건 총선이다. 201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선라이즈’라는 청년단체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민주당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통한 일자리 제공과 산업구조 개편이라는 그린 뉴딜 정책이 급속히 부상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내년 총선을 계기로 기후위기가 국회와 청와대, 공론장에서 의제화돼야 한다. 기후정치의 원년을 만드는 데 내년은 아직 늦지 않은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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