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이념의 탄핵

2020.01.08 21:37 입력 2020.01.08 21:43 수정

세상은 과학과 경험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들로 가득하다. 과학과 첨단 기술의 발전에도 자연은 여전히 무지와 혼돈 투성이고 경제와 사회의 향방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이런 몽매를 헤치고 방향을 잡아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이념(理念)이다. 이념은 과학과 경험칙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조직화된 신념 체계다. 혼돈과 불확실성에 대처하여 개개인과 사회가 행동을 결정하고 미래상을 찾아 협력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갖는다.

[경제직필]병든 이념의 탄핵

이념은 다른 이념, 과학, 경험칙에 의해 견제되고 진화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과 아집으로 병든다. 이렇게 병든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는 쇠락하고 멸망한다. 그래서 다양한 이념이 각축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낡고 부패한 이념은 도태하고 혁신적이고 건강한 이념은 번성하는 이념 생태계.

우리의 이념 생태계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한쪽에 치우쳐 있다. 낡고 병들고 부패한 이념의 퇴행적 정치가 개혁과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지형에서 보수는 지배적 질서, 정상(定常)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을 지향하고 진보는 정상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정상으로 나아갈 것을 지향한다. 보수는 정상의 안정적 유지가 갖는 가치를 팔고 진보는 새로운 정상의 필요성을 판다. 서로 상대방이 파는 가치를 깎아내리는 합리적 공방 끝에 득세하는 이념이 선별된다.

4·19의거와 6·10항쟁에서 진보가 제시한 새로운 정상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였다. 독재의 패악을 낳은 정상의 한계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상의 필요에 대다수가 공감했다. 보수는 진보를 “용공집단” “빨갱이” “좌파사회주의”로 모는 반공 파시즘으로 대응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독재자는 물러났다. 후진국 한국의 이념 생태계에서 보수는 파시즘이었고 진보는 민주주의였다.

역설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첫 선거에서 보수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반공 파시즘의 그늘을 못 벗어난 국민 36.6%의 지지로 재집권했다. 12·12쿠데타의 주역, 독재의 핵심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민주화된 한국의 새로운 정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재자와 그 일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뒤늦었고 불완전했다. 보수와 진보의 합종연횡 그리고 지역갈등에 편승하여 파시즘은 여전히 보수의 주축으로 남았고 후진국 한국의 퇴행적 이념 생태계를 존속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권교체를 이룬 진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충실하게 국가 경제를 재정립했다.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이라 일컫는 이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이전과 질적으로 차별화된 기술선도 경제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진보정권 10년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보수개혁이었고 없는 자들의 무한경쟁과 극심한 사회·경제 양극화를 낳았다. 진보는 경쟁, 혁신, 그리고 정상적 시장경제를 추구했고, 그래서 진보의 탈을 쓴 “운동권 보수”라고 보아 마땅했다. 그리고 다시 퇴행적 종북몰이로 점철된 보수 파시즘, 그 10년의 반동(反動)은 운동권 보수보다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했고 후진국형 개발독재의 퇴행과 적폐를 양산하다 마침내 그 지도자의 탄핵으로 끝났다.

이렇게 한국 정치의 이념 생태계는 병들었다. 소수가 배제되고 거대 양당이 독점하는 이념 생태계에서 진보의 이념은 빈약하고 보수의 이념은 시대착오적 극우에 치우쳤다. 거대 양당의 공방이 보이는 극단의 언어와 허황된 비판 그리고 극한의 폭력 대치가 이를 증명한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노쇠한 인맥, 시대착오적 반공 극우파시즘, 분단과 군사적 대치를 악용하는 정치, 거대 정당이 독점하는 의회정치, 이런 것들이 이념 생태계를 오염시켰다.

현 집권세력은 진보가 아니라 중도 보수의 이념에 가깝다. 공정경제와 혁신성장이란 정책기조는 현 보수야당이 추구했던 경제민주화 및 창조경제와 같은 맥락이다. 시장경제의 경쟁과 혁신을 가로막는 불공정과 재벌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근절하자는 것,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세제개혁과 복지정책도 중도개혁에 가깝다. 더 진보적 이념들로 이념 생태계가 균형 잡혀야 한다. 노동자, 여성, 이민자, 외국인 등 차별받는 구성원들을 대변하는 진보, 환경의 가치와 미래세대를 대변하는 진보, 급격한 기술변화의 부작용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진보의 이념 다양성이 필요하다. 속임수, 거짓, 협잡과 꼼수에만 능한 병든 이념의 폐족들을 탄핵하고 합리적 보수와 다양한 진보의 이념들이 진검승부를 벌이는 건강한 이념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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