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월급’ 불편한 진실

2020.01.14 20:38 입력 2020.01.14 20:39 수정

바야흐로 ‘유리지갑’ 봉급생활자들의 ‘13월의 월급’ 연말정산의 시간이다. 오늘부터는 국세청까지 나서 의료비, 기부금 등 공제자료를 일괄 수집한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제와 세상]‘13월의 월급’ 불편한 진실

연말정산은 매달 봉급을 받을 때 뗐던 세금을 고용주가 최종 확정해 정산하는 작업이다. 작년엔 1250만명이 1인당 평균 58만원씩 약 7조2000억원을 돌려받았고 351만명은 1인당 평균 84만원씩 약 3조원을 더 냈다. 엄청난 규모다. 하지만 사실은 돌려받는 환급금은 추가로 받는 ‘보너스’가 아니라 최장 13개월간 잘못 낸 ‘무이자세금’에 불과하다.

정부에 연말정산은, 1850만명이나 되는 봉급생활자를 일일이 대하지 않고도 고용주에게 의무만 지워서 38조원의 세금을 손쉽게 징수하는 신통방통한 제도다. 이런 제도 덕에 세계 최저 수준의 징세비, 최고 수준의 가성비를 자랑한다.

연말정산은 ‘경제’다. 지출액의 소득공제나 세액공제 여부에 따라 시장과 경제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20년 전 김대중 정부가 신용카드 사용액 소득공제를 도입하면서 자영업자 과표 양성화와 함께 내수 확대까지 이뤘다. 연말정산은 오늘날 신용카드 경제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이다. 그만큼 경제정책과도 밀접하다.

연말정산은 ‘정치’다. 박근혜 정부가 2013년 출범하자마자 세수부족 속에 봉급생활자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는 세법개정안을 내놓았다. 기업 감세 속에 유리지갑 증세로 촉발된 ‘연말정산 사태’는 몇 년간 정국을 뒤흔들었다.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고 두 번의 연말정산까지 허용하며 세금을 줄여주었지만, 민심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중차대한 연말정산에 얼마 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초일류 기업인 삼성이 그룹사 임직원들의 연말정산 자료를 뒤져 진보 단체와 정당에 후원 기부한 사람들을 특별관리해온 사실이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삼성의 연말정산 자료 사적 전용은 사생활 보호와 행복추구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범죄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운영의 근간이자 국민의 의무인 납세를 방해하는 일이다. 그동안 국세청은 세법상 ‘비밀유지’ 규정에 따라 대의기관인 국회가 요구해도 개별 납세정보는 끝까지 비공개해왔다. 그런데 세법절차에 따라 정부와 고용주를 믿고 넘긴 개인정보와 납세정보를 이같이 잘못 사용된다면, 납세자는 불안해 어떻게 살고 누굴 믿고 납세할까?

미국 등 외국에서는 봉급생활자의 소득세는 고용주를 통해 원천징수하기는 하지만 정부도 아닌 개별 기업에 사생활 정보를 넘기면서 연말정산을 하라고 하진 않는다. 다른 납세자가 그렇듯 세금 신고는 자기 책임과 계산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정부는 비용과 시간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납세자를 지원한다.

우리는 정부가 조세입법을 대부분 주도하다 보니 민간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국민에게 손해를 주는 것은 물론 민주질서마저 흐트러뜨리는 세금제도가 버젓이 운영된다. 삼성의 연말정산 스캔들은 후진적인 연말정산 시스템의 조종을 울리고 있다. 우선 연말정산을 위한 사생활 정보나 납세정보는 사적 전용을 금지하는 등 세법상 비밀유지의무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고용주에게 일방적으로 맡길 게 아니라 납세자가 직접 자기 소득과 공제 내용, 환급 규모를 확인하고 원클릭으로 소득세를 신고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국세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원천납세 전산정보와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자료 등 과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시스템 구축과 시행에 무리가 없다.

‘13월의 월급’이라는 미명 아래 봉급생활자의 기본권을 훼손하고 우민화해온 연말정산, 이제 봉급생활자가 정보와 납세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정당한 소득세 납세자로 거듭나게 바꿔야 한다. ‘13월의 월급’에 취하면 ‘유리지갑’은 결코 세금주권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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