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밀어준 바람

2020.02.20 20:31 입력 2020.02.20 20:47 수정

<기생충>이 올해 오스카의 얼굴이 됐지만 감독상 후보에 오른 모두가 남성이었고 배우상 후보 대부분도 백인이었다.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로렌 스카파리아, 그레타 거윅, 셀린 시아마 등 훌륭한 작품을 냈지만 아카데미가 주목하지 않은 여성 영화인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망토를 걸친 채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로이터연합뉴스

<기생충>이 올해 오스카의 얼굴이 됐지만 감독상 후보에 오른 모두가 남성이었고 배우상 후보 대부분도 백인이었다.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로렌 스카파리아, 그레타 거윅, 셀린 시아마 등 훌륭한 작품을 냈지만 아카데미가 주목하지 않은 여성 영화인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망토를 걸친 채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이 네번째 오스카상까지 거머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단톡방 메시지가 떴다. “작품상 받았대요”라는 말 뒤로 글자보다 많은 여덟 개의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19를 필두로 쏟아지는 무거운 소식들 때문에 발랄한 기분이기 어려운 시기에, 모처럼 모두에게 얼마간 들뜬 얼굴이 되게 하는 단비였다. 나 역시 각종 영상과 이런저런 뒷얘기와 해석들을 찾아보며 <기생충>의 성취를 흠뻑 즐겼다. 그후 며칠간, 누구와 만나도 대화의 얼마간은 <기생충> 얘기로 채워졌다. 대단한 개인의 성취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일뿐더러, 그 성취를 얼마간 ‘우리의’ 성취처럼 느낄 만한 구석이 있다면 함께 고양되는 흐뭇함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제현주의 굿 비즈니스, 굿 머니]‘기생충’을 밀어준 바람

시상식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으로 쏠리기 시작한 순간은 뭐니뭐니해도 ‘감독상’이 주어졌을 때였다. 봉 감독이 무대에 서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옮기고 무대 아래 영화인들이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칠 때, 등줄기가 살짝 서늘해지는 비현실감이 느껴졌다. 봉 감독은 외부자에게 문을 열어준 아카데미에, 나 역시 당신들과 연결된 일부라는 메시지를 우아하게 되돌려주고 있었다. 봉 감독의 이 소감은 탁월하고 영리했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성취를 향한 여정의 출발엔 영화를 그저 미친 듯이 좋아했던 12살 소년의 개인적 열망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의 한 강연에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라. 누가 뭐라든 듣는 척만 하고 무시해라.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말을 힘줘 한 바도 있다. 긴 시간 개인적인 열망을 놓지 않는 게 순탄하기만 했을 리 없다. 매끈하지만은 않았을 길을 걷는 동안, 스코세이지의 그 말이 희미한 가로등 하나쯤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하는 데는 탁월한 영화와 위대한 감독 이상이 필요하다. <기생충>은 딱 알맞은 순간 등장한 작품이었고, 2020년 아카데미를 몰아가는 바람은 <기생충>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OscarsSoWhite(오스카는 백인 일색) 해시태그 운동으로 요약되는 다양성 요구는 5년 넘게 이어지며 점점 세가 커진 사회적 요구였다. 카메라의 뒤든 앞이든 백인 남성으로 한가득 채워진 영화들, 그런 영화들로만 가득 채워진 오스카 시상식을 사람들은 부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했고, 백인 일색의 오스카는 낡고 뒤처진 것으로 보이기에 이르렀다. 한둘의 목소리가 사회적 요구가 되고, 사회적 요구가 시장의 흐름이 되면, 그때부터 목소리는 놓치면 안되는 기회이자, 넘기면 도태될 위협이 된다. 바로 이 변곡점이 가장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2020년의 오스카 시상식이었을 것이다.

<기생충>을 밀어준 사회적 요구의 바람은 영화계에만 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의 기회로 해석하고 포착하는 임팩트 비즈니스는 이런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는지 보여주는 풍향계의 역할을 한다. 환경을 고려하는 소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술, 포용적인 금융, 젠더 편견을 탈피하는 패션, 일하는 자의 복지를 돌보며 만들어지는 서비스. 임팩트 비즈니스가 지향하는 가치들의 예시다. 이런 가치들은 개별의 창업자들이 자기 마음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기에 비즈니스로 구현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 되는 순간들이다.

임팩트 비즈니스가 영화 한 편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임팩트 투자는 사회적 요구를 알아채는 데서 출발한다. 임팩트 투자는 개별의 개인적인 것들이 사회적 요구가 되고, 곧이어 시장의 흐름이 되는 순간을 한발 앞서 포착하려는 시도다. 어느 지점 어떤 순간에 자본을 투입해야, 그 시장의 기회를 한발 앞서 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어떤 사회적 요구에 언제 힘을 실어야 가장 큰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어떤 사람들의 가장 개인적인 욕구는 사회적 바람의 풍향계가 되어준다. 그 바람이 너무 거세져 돛을 세울 수 없어지기 전에 큰 돛을 지어 좋은 배에 달아주는 일이 임팩트 투자다.

<기생충>이 올해 오스카 얼굴이 되었지만, 오스카를 향한 다양성 요구는 멈추지 않는다. 감독상 후보에 오른 모두가 남성이었다는 점, 배우상 후보 대부분이 백인이었다는 점은 빠지지 않고 지적을 받았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내년의 오스카도, 점점 더 많은 영화자본도 이 바람에 반응할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바람을 거스르는 사람이 바람을 등에 업은 사람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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