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경 보유국’ 그 이상이 되려면

2020.05.04 20:45 입력 2020.05.05 10:13 수정

[김민아 칼럼]‘정은경 보유국’ 그 이상이 되려면

가까운 지인들이 미국 뉴저지주와 영국 런던에 살고 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지인은 다행히 며칠 후 귀국한다. 영국에 사는 이는 ‘공무 파견’이라 마음대로 돌아올 수 없다. 마스크라도 부쳐주고 싶지만 직계 가족이 아니어서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페이스북 메신저로 자주 안부를 묻는 일뿐이다.

[김민아 칼럼]‘정은경 보유국’ 그 이상이 되려면

지난 2월 말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한 이후 헬스장에 가지 않고 있다. 대신 마스크 쓴 채 한강변을 걷는다. 평일 아침 출근 전에는 짧게, 주말에는 조금 오래 걷는다. 초여름 같았던 지난 토요일, 서울 마포에서 출발해 한강대교까지 걸어갔다. 이촌동 빙수집에 들러 올해 첫 팥빙수도 맛보았다. 런던의 지인에게 빙수 사진을 보내주자 ‘꺄악’ 하는 소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몇 달째 집 안에 갇혀 노트북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그는 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 보듯 부러워했다.

왜 아니겠는가. 출근하고 산책하고 맛난 음식을 먹는 일은 얼마 전까지 흔하디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78억 세계 인구 가운데 소수만 누리는 ‘호사’가 되었다.

일상을 지켜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다. 정은경 본부장을 비롯한 질병관리본부 공직자, 의사·간호사·약사, 경찰관·소방관, 공항 검역요원, 일선 시·군·구 공무원, 병원 노동자, 택배 노동자…. 그들의 헌신적 노동 덕분에 나의 건강과 평안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일(6일)부터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가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된다. 운영을 중단했던 공공시설이 방역지침에 따라 단계적으로 문을 연다. 초·중·고교 등교 수업도 순차적으로 재개된다. 고3이 오는 13일부터 등교하고, 나머지 학년은 20일부터 세 차례로 나눠 등교를 시작한다.

정은경 본부장은 그러나 지난 3일 정례 브리핑에서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하더라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지켜온 5대 개인방역수칙은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수칙은 아프면 집에 머물기, 건강한 거리(2m) 두기, 손 씻기와 기침 예절, 마스크 착용, 주기적 환기와 소독 등이다.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정 본부장의 브리핑 기사를 링크한 뒤 “계속 말 잘 듣자”고 적어놓았다. 웃음이 나왔다. ‘정은경’은 이제 하나의 ‘나침반’이 되었다.

공직자의 최대 자산은 시민의 신뢰다. 신뢰를 만드는 조건은 실력과 태도이다. 실력이 뛰어나도 태도가 오만하거나 불성실하면 신뢰받지 못한다. 태도가 겸손하고 성실해도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뢰는 물 건너간다. 정 본부장은 드물게 두 가지를 겸비함으로써 주권자의 믿음을 얻었다.

정 본부장의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지만 모두 사양하고 있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렇게 전한다. “성실하고 꼼꼼하다. 절대로 부하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학습량이 엄청나다. 고위공무원이 된 후에도 모든 디테일을 파악하고 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항상 업무현장에 있었다. 당시 주변에선 그를 보며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혹시 세쌍둥이가 8시간씩 돌아가며 근무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에 ‘정은경 보유국’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러나 신종 감염병의 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 본부장이 언급했듯 “코로나19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2차 유행이 우려된다. 또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다. 언제까지 정 본부장을 비롯한 영웅들의 ‘영혼까지 갈아넣는’ 희생에 의존할 수는 없다.

재난 상황에서 공무원의 헌신적 노동, 의료인의 자발적 협력, 시민의 윤리적 실천은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할 과제는 시스템을 강화하는 일이다. 부족한 공공병상과 중환자병상을 늘리고,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의사·간호사 인력을 공공의료기관에서부터 확충해야 한다. 코로나19 희생자 250여명의 유가족, 그리고 병상에서 고통을 겪은 1만여명이 바라는 바도 이런 것이리라 믿는다.

지금 ‘한국판 뉴딜’을 앞세워 원격의료를 본격화하겠다고 나설 때가 아니다. 영웅들의 노고에 상응하는, 획기적 공공의료 투자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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