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따위에겐 친절하지 않기로

2020.05.25 03:00 입력 2020.05.25 03:04 수정

인간 최희석은 경비원 ‘최씨’로 사는 바람에 억울한 죽음을 택했다. 생전에 그를 돕고자 애쓴 착한 입주민들이 많았지만, 단 한 명의 악의와 폭력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가해자가 처벌받기도 전에, 한 택배기사 형제가 입주민의 폭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를 봤다. 갑질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제2, 3의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일년 정도 경비일을 한 바 있다. ‘최씨’만큼은 아니지만 그곳에도 갑질은 있었다. 그때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을 평생 하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 덕분이었다.

그러나 60을 앞둔 그에게 다른 일자리라는 희망은 사치였을 것이다.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는 그에게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란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것일 테다. 그래서 그는 ‘최씨’가 되고, 머슴으로 살았다.

“경비가 하는 일이 뭐가 있는데? 그럼 공손하게 시키는 일 하는 맛이라도 있어야 돈을 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평범하고 일반적인가. 갑질을 막기 위해 경비원의 업무를 제한하자는 기사에 달린 위와 비슷한 내용의 댓글에 ‘좋아요’가 수천개씩 달려 있는 걸 보면, 경비원 최씨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이 까마득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일자리라고 사정이 썩 다른 것은 아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하는 편의점에서도 반말을 하고, 억지를 부리고, 화를 내고, 욕을 하는 손님이 가끔 있다. 상품 재고가 다 떨어져 다음에 오시면 꼭 챙겨 드리겠다는 말에 장사 접게 해주겠다고, 내가 누군지 아냐는 분도 있었다. 이런 일을 두고 어쩔 수 없다며 적응하는 데 우리 가족 모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쓰라린 마음을 막걸리 한 잔으로 달래고 남몰래 눈물 훔치면서도 견디는 부모님의 모습에 현실이 참으로 지독하다 생각했다. 돈을 내는 사람은 왕이고, 돈을 받는 사람은 머슴이 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먹고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마음은 폭력에 서서히 길들여져 곪아간다. 폭력에 익숙해지다보면 내가 ‘갑’일 기회가 생겼을 때 마치 보상심리처럼 대우받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럴 때 ‘을’에게 이 욕망을 푼다. 내 세금으로 빌어먹는 공무원 놈들, ‘이런 일’이나 하는 못 배운 놈들, ‘이것밖에’ 못 버는 놈들. 직업과 신분에 귀천이 없다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귀천을 나누고 자신은 갑이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런 보상심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의 대상을 착각하는 것이다. 이 폭력은 남에게 돌려준다 하여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당한 갑질을 남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결국 또 다른 ‘최씨’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성함은 최씨가 아니라 최희석이다. 폭력의 사슬이 폭력을 평범하게 만들고,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내가 인간 박진웅으로 대우받기를 바란다면, 누군가를 ‘최씨’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당한 갑질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 아니라 과감히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인격이 아니다. 돈을 주고 사람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과 결과물을 사는 것이다. 계약은 정당해야 하며,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이 말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돈으로 인격을 사고, 노동이 아닌 사람을 샀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비현실적인 욕망을 휘두르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내 인격을 팔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고, 그래도 되는 사회를 만들면 좋겠다. 폭력의 사슬을 단호히 끊어내는 것, 그게 우리가 ‘최씨’가 아닌 ‘인간 최희석’의 억울한 죽음에 바칠 수 있는 헌화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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