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선

2020.07.17 03:00 입력 2020.07.17 03:05 수정

인국공 사태! 단어가 풍기는 음습함에 화들짝 놀랐다. 자고 나면 간첩이 만들어지던 흉악한 세상을 산 나로서는 갑자기 ‘인민공화국’이 쳐들어왔나 온몸이 저릿했다. ‘인국공’이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1980년 ‘광주 사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사태’가 고작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상적’ 과정에 퍼부은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니! 웬 블랙코미디가 이리도 심한가 씁쓸했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니 아연 소름이 돋았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한 경제지는 인국공 사태라는 용어가 불러내는 것처럼 붉은색을 덧칠했다. 정규직 전환 인원이 기존 정규직 노조원보다 많다. 대부분 보안검색요원인 이들이 정규직 전환 후 별도 노조를 만들면 인국공의 대표 노조가 된다. 보안검색요원 노조가 사무직의 임금협상까지 좌우하게 될 판이니 기존 노조가 정규직 전환을 결사반대한다. 절차의 공정 운운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받을까 두려운 거다.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 취업난 해결의 걸림돌인 ‘붉은 노조’는 정규직의 철밥통을 깨부수고 비정규직처럼 유연해져야 한다.

한 보수언론은 공기업을 준비하는 20·30대에게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화에는 85.2%가 반대이고, 찬성은 고작 14.8%. 입사에 들인 ‘노오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정규직화를 추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응답이 43.9%나 된다. 자신들은 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시간, 돈, 노력을 써가며 수년째 시험을 준비하는데 인국공 보안검색요원은 정직원을 날로 먹었다. ‘진보’ 정부가 약속한 기회의 공정성이 무너졌다며 배신감에 치를 떤다.

이러한 보도를 접하면 청년이 자신의 권리만을 위해 투쟁하는 이익집단처럼 보인다. 물론 자기 이해관계 추구를 긍정하는 현대 시장사회에서 청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기성세대에 눌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이제라도 목소리를 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청년이 시험 결과에 따른 차등 보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왜곡된 성과주의에 빠진 속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정말 청년이 모조리 속물로 추락했는가?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럼 무엇이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쟁 메커니즘이 사회적 삶을 조절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희소 자원을 독점한 구매자가 판매자끼리 ‘경쟁’을 시킨 후 최종 승자와 ‘교환’ 관계를 맺는다. 판매할 거라곤 노동밖에 없는 대다수 청년은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이란 신자유주의적 교환 절차에 불과하다. 청년은 교환의 당사자가 되기 위해 죽어라 경쟁하지만 결국 소수의 성공주의자와 대다수의 생존주의자로 갈린다. 생존주의자 사이에 싸움이 치열해진다. 이 싸움에서 지면 좀비로 추락한다. 좀비는 가치도 쓸모도 없는 사회적 쓰레기다. 오로지 잘하는 건 자신을 패배시킨 다른 생존주의자 물어뜯기. 생존주의자는 좀비를 피해 도망다니며 저주를 퍼붓지만 물리는 건 시간문제다. 경쟁을 피해 집 안에 들어앉은 ‘지방 청년’이라고 마냥 안전하지만은 않다. 잠시 문을 가로막고 있는 부모가 힘을 잃는 순간 좀비가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다.

이대론 안 된다는 절실한 마음에 청년이 공정을 외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쟁 메커니즘이 보여주듯 절차적 공정을 통해서도 ‘악한 사회’는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좋은 삶이 무언지 묻지 않고 무작정 공정만 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따져 물어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그럴듯한 ‘경제 언어’로 사실상 추악한 신분제를 구축하고 그 경제적 효율성을 찬양하는 대한민국은 과연 ‘선한 사회’인가?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