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권리

2020.12.09 03:00 입력 2020.12.09 03:03 수정

‘부캐’란 용어가 올해 주목받았다. 본래 온라인게임에서 주로 쓰인 말이다. 이미 육성한 캐릭터가 있지만, 새 캐릭터를 다른 종족이나 특성으로 키울 때 쓰였다. 이제는 유명 연예인이 기존과 다른 이름으로, 새 영역에서 색다른 이미지로 활동하는 일을 설명할 때도 쓰인다.

부캐 육성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선입견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얻을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였던 연예인도 부캐를 키우면 맘껏 깐족거릴 수 있다. 부캐라는 이름 아래 대중은 이를 관대하게 볼 것이다. 부캐는 연예인의 개성을 확장시켰고, 매너리즘에 빠진 이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최서윤 작가

최서윤 작가

일반인들도 부캐를 활용한다. 여행지에서, 혹은 독서모임이나 미식모임 등 취미생활에서 부캐를 내세운다. 서로 신원을 안 밝히고 닉네임으로 부르며 교류하는 식이다.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드러내길 원하는 정체성을 선별해 표출함으로써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올해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불렀다. 새로 시작한 취미는 춤(물론 방역수칙을 지키며 운영됐고 거리 두기 단계 격상에 발맞춰 현재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춤 교습소 밖에서 만날 정도로 친해질 경우 정보를 좀 더 공개하겠지만, 적어도 교습소 안에선 ‘춤을 멋있게 추고 싶은 익명의 홍대 지역 거주민’ 이상의 정보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모두 동의했기에 ‘닉네임 문화’가 형성된 것 아닐까?

아니었나 보다. 쉬는 시간, 구석에서 춤을 추는데 한 수강생이 힐끗거리는 눈치였다. 그가 강사에게 다가가 뭔가 말하는데, JTBC, TV 프로그램, ‘클라스’ 등의 단어가 들려왔다. JTBC 교양 방송에 출연하고 있기에, ‘혹시 내 얘기 하나?’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의식 과잉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살자’라는 온라인 격언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얘기였다. 강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곳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분이 그러는데, TV에 나오시는 분 맞아요? 최서윤씨라고….”

“아니요.”

나도 모르게 잽싸게 부정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을 시끄럽게 한 의문들 때문이다.

마스크도 썼는데 어떻게 알아봤지? 너무 나댔나? 그렇더라도 개인적으로 다가와 조용히 확인해야 하는 것 아냐? 이건 일종의 ‘아우팅’과 같지 않나.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를 포함한 다수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며 닉네임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왜 나만, 교실 모두에게 ‘본캐’가 노출되어야 하는가? 내가 불편한 마음을 가져 앞으로 수업에 안 나오길 바랐던 걸까? 더 이상 그곳에서 부캐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춤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며 강습이 중단됐다. 사태 진정 뒤 다시 찾은 춤교실은 내 본캐를 알더라도 개인적으로 물어보는 이들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모른 척해주면 더 좋겠고. 부캐의 권리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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