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일

2021.01.11 03:00 입력 2021.01.11 03:03 수정

연말,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 사는 딸들과 모처럼 와인잔을 기울였다. 놓칠세라, 그중 한 순간을 SNS에 올렸더니 뜻밖의 댓글이 달렸다. “‘모제토’는 잘 있나요?” 와인잔을 든 작은아이의 손등에 새겨진 ‘mozeto’라는 타투를 본 지인의 댓글이다. 그러고 보니 작은 아이의 독립은 직장 때문이 아니라 ‘모제토’와 함께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모제토’는 작은도서관 ‘책고집’의 층계참에서 발견한 새끼고양이 삼총사 ‘모모’ ‘제제’ ‘토토’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책고집에서 발견했고, 한동안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 기왕이면 책과 관련된 이름을 지어주자 싶어 작은아이와 머리를 맞대 작명했다. 얼마 후 책고집을 찾는 모든 이가 고양이 냄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집으로 데려왔지만, 공동주택인 아파트에서 개와 고양이, 그것도 넷씩이나 함께 사는 건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부득이 분가하게 되었고, ‘캣맘’을 자처한 작은아이의 손등에는 급기야 녀석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타투를 하기로 결심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나는 변하지 않을 어떤 것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고양이들을 반려하면서 내 삶은 달라졌고, 달라진 채 지속될 것이었다.”(박소영 저, <살리는 일>에서) 연초 거짓말처럼 손에 잡힌 책이 <살리는 일>(무제 펴냄)이다. 서둘러 작은아이에게 추천했으니 지금쯤 읽고 있을 것이다. 캣맘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과, 손등에 새긴 ‘모제토’를 향한 열렬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무릇 세상사는 살리는 일이다. 우리네 삶도 그 무엇을 살리는 일이다. 각자 옳다고 믿는 어떤 가치를 살리고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산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서부터 싹트는 감정이며, 거기에 형식과 내용을 얹어 문자로 표현하는 일이 문학이다. 그림은 죽음을 애도하는 것, 즉 영혼을 살리는 일에서 출발했고, 음악은 자연의 소리를 되살려 인간의 삶에 연결하려는 의도에 기원한다. 그러니 예술은 살리는 일이며, 특히 작은 것, 약한 것, 아픈 것을 살리는 일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예술이라면, 달라야 한다. 예술은 작고 약한 생명을 위한 옹호이자 지지여야 한다. 가장 작은 존재가 딛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목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치고 지워져야 한다면, 거기엔 예술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내가 아는 한 배제와 착취는 예술과 가장 먼 단어다.”(<살리는 일>에서)

단장(斷腸)의 고통을 겪고 있는 김미숙씨가 낮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은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는 것이 아니다. 해고노동자 김진숙씨가 35년 만에 복직을 꿈꾸는 것은 그간의 밀린 급여를 챙겨 안락한 여생을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혹한의 거리에서 단식을 하고, 항암치료를 마다하고 다시 길 위에 선 것은, 죽은 이들을 살려내라는 생떼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이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위험을 외주 받은 하청업체의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퇴근하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이들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정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네 정치는 끝내 사람 살리는 일을 외면하고 있는 건가. 김미숙씨를 비롯한 산재 사고 유가족들이 제정을 촉구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처벌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해의 예방을 통해 사람을 살리자는 것이다. 정치는, 이제라도 정치 본연의 일인 사람 살리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작은아이는 조만간 거처를 옮겨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고양이 셋과 함께 사는 캣맘에게 흔쾌히 세를 내줄 집주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모제토’와 아이는 꿋꿋하게 함께 살 공간을 찾아 나선다. 부디 우리 아이들이 맞춤한 공간을 찾길 바란다. 그것은 사는 일이면서 동시에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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