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2021.02.18 03:00 입력 2021.02.18 03:03 수정

[이범의 불편한 진실] 박정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부동산, 의료, 교육은 사회정책의 핵심이다. 셋 중에서 정부의 힘이 가장 강한 곳은 어딜까? 정부의 힘을 곧 ‘가격을 결정할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정부의 힘이 제일 센 영역은 ‘교육’이다. 오로지 정부의 힘으로 10년째 대학 등록금을 동결시키고 있지 않은가? ‘의료’는 중간이다. 국민건강보험 급여 진료비는 정부가 결정하지만 비급여 진료비는 시장이 결정하므로. 정부의 힘이 가장 약한 영역은 ‘부동산’이다. 주택 가격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 원리에 의해 좌우되며, 정부의 힘은 조세나 대출·재건축 규제 등 간접적 작용에 그친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수요 감소’라는 시그널도, ‘공급 증가’라는 시그널도 제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요약된다. ‘주택은 살 것이 아니라 살 곳’이라는 도덕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1990년대 초반과 2010년대 초반 서울 집값 하락세를 이끈 것은 ‘투기와의 전쟁’이 아니라 ‘1기 신도시’와 ‘보금자리주택’의 공급이었다. 도덕률이 아니라 지극히 시장원리에 충실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공급 계획을 쏟아내고 있지만, 올해와 내년 서울 아파트 공급이 바닥 수준임을 고려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아이러니는 정부의 힘이 가장 약한 부동산에서는 강경책을 내놓고, 정부의 힘이 가장 강한 교육에서는 힘쓰기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유승민·심상정 후보는 외고·국제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공약했고, 안철수 후보는 학생 선발권을 박탈해 ‘선지원 추첨’만 허용하겠다고 했다. 5대 후보 가운데 4명이 대략 고교평준화의 범주에 속하는 공약을 제시한 데다, 공약을 실현하기도 쉬웠다. 자사고·특목고에 대한 규정이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있기 때문에 국회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단계적 전환’을 내세우며 교육청의 재지정 심사로 공을 넘겼고, 소모적 시비 끝에 재지정 심사에서 탈락한 자사고들은 법원의 가처분 인용으로 모두 구제되었다. 조국 사태 이후 뒤늦게 ‘일괄 전환’ 계획을 밝혔지만 2025년 예정이니 차기 정부의 일이 되어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미온적 교육정책은 놀랍게도 또 다른 도덕률의 산물이다. 이 도덕률의 핵심 가치는 ‘자율’인데, 박정희가 사립학교의 자율을 깔아뭉개고 고교평준화를 단행한 것을 관치와 개발독재와 국가주의로 여겨 비판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고시인 수능보다 ‘대학 자율’을 상징하는 수시를 선호한다. 이러한 사상은 박정희와 직접 맞섰던 75세대(1970년대 학번, 1950년대 출생)의 진보 지식인들에게 종종 발견되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구심점은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그의 재벌개혁론이 ‘지분에 비례하는 지배’로 요약되는 시장원리에 충실한 버전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12년 전에 ‘박정희를 본받으라’는 칼럼에서 공공의료보험, 그린벨트, 고교평준화가 모두 박정희의 유산인데 보수는 이를 허물려 하고 진보는 이를 지키려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적한 바 있다. 박정희는 100% 개인 재산으로 민간병원이나 사립학교를 세워도 원하는 환자를 골라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원하는 학생을 골라 뽑을 수 없게 했다. 이 정도로 사유재산권을 억압하는 제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엘리트 집단은 종종 이를 비판하지만 대중은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당연지정제 해제와 영리병원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반대가 찬성을 상당한 격차로 앞서고, 한국교육개발원이 매년 실시한 조사에서 고교평준화 찬성은 반대의 2배 정도에 달한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원리를 존중해야 할 영역에서는 힘을 앞세워 폭주했고, 정부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시장원리를 고려하며 주저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박정희라는 모순적인 유산을 공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지점은 진보와 보수가 교집합을 넓혀갈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민간병원과 사립학교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진보가 인정하고, 공익을 위해 사유재산권을 억압하는 박정희식 사회정책이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의 원형’임을 보수가 인정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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