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이미 파산했다

2021.03.18 03:00 입력 2021.03.18 03:01 수정

[이범의 불편한 진실]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이미 파산했다

2017년 문재인 대선 캠프의 정책총괄단위에서는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제출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와 ‘공영형 사립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그 돈을 들여 확실한 효과가 있을 거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 효과도 극히 의문시된다.” 나는 당시 핵심 관계자로부터 이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해왔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첫째, 대학 서열화의 원인을 오해한다. 국립대들을 통합한다고 해서 이들이 서울대와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는 게 아니다. 대학 서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재정이다. 2019년 기준 학생 1인당 투입되는 연간 교육비는 서울대 4800만원, 연·고대 평균 2800만원, 서강·성균관·한양대 평균 2300만원, 중앙·경희·외국어·시립대 평균 1500만원, 서울대 외 9개 거점국립대 평균 1700만원이다. ‘돈’의 격차는 ‘교육의 질’의 격차를 낳는다. 일례로 교수 대 학생 비율이 대학 레벨에 따라 20~30%씩 차이난다. 학연, 명성, 위치 등도 대학 서열에 영향을 주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재정이다. 한예종, 카이스트, 포스텍이 개교 초기부터 최상위권 서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둘째, 사립대가 많고 특히 수도권에서 사립대 비율이 압도적인 한국 대학구조의 특수성을 간과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 등 10개 거점국립대를 통합해 가칭 한국대를 만들고, 한국대에 연·고대 수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투입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대와 연·고대에 동시 합격한 학생은 어디를 선택할까? 십중팔구 연·고대를 선택할 것이다. 한국대의 학연은 아예 없으며, 명성은 불확실하고, 입학자 중 서울캠퍼스 배정 확률은 9%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재정이 연·고대와 동등하다 해도 학연, 명성, 위치에서 연·고대에 밀린다. 그렇다면 투자를 더 늘려 한국대를 서울대급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대입 경쟁은 크게 줄어들기 어렵다. 한국대 입학정원이 3만4000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구조에서 국립대에 편중된 정책으로는 ‘공공성을 높였다’고 자위할 수 있을 뿐 대입경쟁을 줄이기는 어렵다.

셋째, 명문 사립대의 반작용을 간과한다. 정부가 국립대에 집중 투자하는데 명문 사립대가 손만 빨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들은 등록금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면서 재정 확충과 우수 학생 유치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즉 사립대가 수행해오던 나름의 공공적 기능을 저버리고 반대 방향으로 ‘맹렬한 진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립대 통합을 ‘공영형 사립대’로 보완하려는 시도 역시 무망하다. 공영형 사립대가 되려면 이사진의 절반 이상을 공익이사로 교체해야 하는데, 이는 곧 사학재단이 기득권을 전면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방안에 관심을 가질 대학은 서울 지역 주요 사립대들이 아니라 주로 학생 수 감소로 인해 한계상황에 다다를 것이 예측되는 비수도권 사립대들이다.

이미 파산선고된 이 정책을 2022년 대선을 계기로 리바이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대학 서열의 물질적 토대를 간과하고, 정책 효과를 ‘경쟁 경감’이 아니라 ‘공공성 강화’로 측정하려 하며, 한국 대학구조의 특수성을 무시한 갈등유발적인 방안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한다.

대안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자. 첫째, 학부 교육 여건의 상향평준화. 이를 통해 ‘대입 경쟁 완화’와 ‘대학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한국은 대학 교육비 투자율이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예를 들어 서울대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15명인데 이게 OECD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 둘째, 포용성과 사회적 대타협. 국공립대 및 주요 사립대가 공동입학제에 참여하는 대가로 정부 지원금을 파격적으로 늘리되, 사립대에는 학생선발권과 감사권만 요구하고 인사권 등 핵심 자율권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학부 평준화’와 ‘대학원 차등화’의 결합. 대학원의 연구기능까지 평준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정부 지원금 증가분을 학부 교육여건의 상향평준화에 우선 투입하고 남는 돈을 연구 목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면, 학부 교육여건이 좋은 대학일수록 연구비 투입액이 크게 늘어나 세계 대학 랭킹이 높아지는 한편 연구중심대학-교육중심대학 스펙트럼의 분화가 촉진될 것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