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은 저리고 오동은 나무니까

2021.03.25 03:00

예닐곱 살 때의 일이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였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화기애애한 얘기가 오갔다. 삼촌이 나를 놀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은이는 이름에 진(鎭) 자가 안 들어가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주워왔다는 이야기, 어떤 다리 밑인지는 가물가물하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몰랐지만, 형과 사촌들의 이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진’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항렬자 혹은 돌림자라고 불리는 그것이 없었다.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일까.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바깥에 있던 아빠가 방문을 열고 내게 왜 우느냐고 물으셨다. “아빠, 왜 내 이름은 오은이야?” 흐느끼며 반문했다. 그때 품었던 감정이 서러움임은 한참 뒤에야 알았지만, 나는 오늘을 잊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억울함에 슬픔이 더해져 감정은 점점 더 격양되었다. “오금은 저리고 오동은 나무니까.” 아빠가 나를 꼭 안으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울음이 그쳤다. 아빠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금이 저리다”라는 관용구가 의미하는 바도, 오동나무의 생김새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냥 웃음이 났다. 대단한 비밀인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 같았다.

농담에 흔히 붙곤 하는 “실없는”이라는 단어는 농담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겨냥한다. 실(實)은 열매나 씨를 뜻하는데, 이는 보통 쓸모나 핵심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 순간은 쓸모없음으로, 핵심에서 비켜남으로써 빛난다. 산책할 때, 서랍을 열어 물건들을 정리할 때, 친구와 만나 회포를 풀 때 우리는 실과 한없이 멀어지고자 한다. 농담을 던진다는 것은 실답지 못한 사람이 되거나 우스운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삶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함께 맥이 빠지고 생활의 무게에서 잠시 해방되는 것이다. 나는 농담을 사랑한다.

강화길의 소설 <다정한 유전>(아르테, 2020)을 읽다가 농담에 대한 대목을 곱씹었다. “이선아는 남편의 동기, 그러니까 남자 선배 D와 잘 맞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의 기를 죽이고 싶어 했다. 남편은 그녀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원래 그 녀석은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한다고 말했다. 선아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정말 농담이라고?” 농담의 성패는 그것을 듣는 이가 결정한다. 듣는 이가 불쾌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농담이다. 맥은 빠져도 기와 분위기는 살려야 한다. 무엇보다 농담은 상대를 웃게 만들어야 한다. 어처구니없어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도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기분 좋아서 웃게 만들어야지 쓴웃음을 짓게 하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면 안 된다. 농담의 본질은 경직된 심신을 이완하는 데 있다.

극중 남자 선배 D는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다.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닌 셈이다. 그가 던진 농담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농담의 역할은 어쩌면 비중을 낮춰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비중의 비장함을 외면하는 농담이 최고의 농담일 것이다. 중요성과 중요도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틈을 만들어주는 농담 말이다. 뼈 있는 농담은 명중하는 농담이다. 농담을 듣는 사람은 웃으면서도 뜨끔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스스로 무너지는 농담은 상대에게 다가가겠다는 신호다. 이처럼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농담도 있다.

농담에 의해 삶의 농담(濃淡)도 변한다.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날카로운 농담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바쁜 삶에 던져진 농담은 숨을 고르게 한다. 농담을 딛고 기지개를 켜거나 농담에 기대 웃을 수도 있다. 농담을 징검돌 삼아 여기에서 거기로 건너갈 수도 있다. 그럴 때 농담은 꼭 진담 같다. 확실히 나는 농담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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