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파시스트 있다

2021.03.11 03:00 입력 2021.03.11 03:03 수정

최근에 재미있는 해외도서를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탈리아의 유명작가이자 방송인인 미켈라 무르자가 쓴 <파시스트 되는 법>(원제 How to be a Fascist)이다. ‘실용매뉴얼’이라는 부제까지 붙어있으니 짐작하듯이 미러링 곧 반어적 풍자의 의도로 쓴 책이다. 이대로만 하면 당신도 훌륭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파시스트가 아닌지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여럿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파시즘’은 흔히 언급되는 단어이기는 하나, 왠지 좌파 지식인들이 우리 실정에는 어울리지도 않은 외국산 이념을 수입해서 폼 잡을 때 쓰는 말 같다. ‘독재’나 ‘유신’이나 잘해야 ‘전체주의’ 같은 말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의 파시즘은 무슨 히틀러, 무솔리니, 국민전선처럼 그렇게 뻔뻔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파시즘은 ‘연성’ 파시즘이라고도 하며,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민주주의자들 틈에 조용히 끼어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파시즘의 징후, 토양은 무엇일까?

먼저 소셜미디어. 인터넷 세상이 활짝 열렸을 때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 같은 좌파 사상가는 더 이상 특정 이념이 세상을 장악할 수 없는 ‘다중’의 시대가 열렸다고 환영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민주주의 이념은 SNS와 1인 미디어 세상에서는 진실과 거짓조차 동등하다는 이념으로 바뀌어버렸다. 이제 의견의 가치는 진위 여부가 아닌 ‘좋아요’ 숫자로 매겨지는데, 파시즘은 이런 토양을 아주 좋아한다.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는 혐오, 막말, 소음을 쏟아냄으로써 내용은 증발시키고 동원의 효과만 거두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파시스트가 좋아하는 무기는 언어조작이다. ‘인종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 부른 나치의 용어법이 대표적이거니와, 이런 언어조작술은 한마디로 나의 결점은 최소화하고 상대방의 결점은 최대화하는 기술이다. 상대방 이미지에 덧칠을 하거나 일부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과장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촬스 왕자, 5세 어린이, 문재앙 같은 별명을 붙여서 깎아내리거나 기레기, 듣보잡, ○○충 같은 어휘로 색칠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 뇌리에는 이미지만 남고 정작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사라진다. 과대 대표도 언어조작술의 하나다. 이주노동자 한 명의 일탈을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 비난하거나, 에이즈·코로나19가 모두 동성애자 탓이라고 설교하는 경우다.

파시스트는 또한 피해자임을 자처하기를 좋아한다. 나처럼 취업을 못한 청년이 수두룩한데 여성 할당제는 무엇이고 장애인 가산점은 또 무엇인가. 이들 무임승차자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우리도 구제하라. 이런 심리는 능력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능력대로 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며 무능력자는 도태되어도 할 수 없다는 19세기 사회진화론의 현대 버전이다.

과거 기억을 조작하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민족인가를 고대의 안갯속까지 더듬어 입증하고, 동유럽과 지중해까지 가서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피해와 고통은 덮고, 그것은 사실 빛나는 오늘을 위한 준비였다고 강변하거나 그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파시스트의 마지막 수단은 폭력이다. 아무리 SNS 악플을 달고 혐오언어를 발산하고 피해자를 자처해도 통하지 않으면, 세를 과시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과거 파시스트들처럼 무기를 들기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군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광화문에 모여, 여차하면 누구든 밀어붙이겠다는 위협적 태도로 불안을 조성한다.

파시즘은 매력적이다. 알 수 없는 ‘적’을 명확히 해주고, 불안한 나의 마음을 응원하여 마음껏 소리치게 해주는 든든한 힘인 것 같다. 혹시 모르는 사이에 내게도 파시스트가 들어와 있지 않은지 점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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