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의 예산 기능을 포함한 정부 조직의 개편은 이번 대선의 쟁점 가운데 하나다. 기재부 예산실 주도로 예산편성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들이 예산 관련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어지간했으면 “여기가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말이 전 총리와 여당 대선 후보의 입에까지 오르내리진 않았을 게다.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수단이 바로 예산이란 점에서 책임정치를 위한 제도 개선은 분명 필요하다. 최근 들어 예산 기능을 미국처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두자는 제안이 논의되는 배경이다.
그러나 조직 개편이 코로나19 이후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뚜렷한 가치 지향 없이 기존 정부 업무의 재분류에 그친다면 그 한계는 명약관화하다. 특히 국가의 역할과 관련해 재정에 대한 당국의 관점이 변하지 않는다면 예산 기구를 청와대로 옮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를테면 ‘한국형 재정준칙’ 같은 것이 문제다. 경제회복이 가시화된 것도 아닌데 경제부총리는, 이번만은 재정준칙을 꼭 법으로 만들어 강제하겠노라고 각오를 밝히는 중이다. 시민들의 경제적 존엄을 국가채무비율 60%, 재정적자비율 3%의 범위 내로 제한하려는 선전포고다. 준칙을 따르다보니 재정총량에 대한 재량의 여지가 거의 안 남은 예산 기구라면 청와대에 둔들 무슨 소용일까.
위기를 겪고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위기는 반복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정부의 재정정책은 이젠 달라져야 한다. 재정준칙 대신에 변화된 경제 환경이 제기하는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급선무는 코로나19 후유증 해소다. 코로나19로 인한 손실과 빚은 계층별로 부문별로 불균등하게 누적되고 있다. 취약계층의 과잉부채는 잠재적인 경제 불안 요인이다. 재정당국으로서는 조급하게 재정건전화에 나설수록 민간부채 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자칫 경제주체들이 부채 최소화에 나서면서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으로 번질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버블 붕괴 후 적자재정으로 대차대조표 불황을 관리했음을 복기할 필요도 있다.
빚 문제는 한계가구와 취약부문부터 먼저 해결하고 국가채무는 우선순위에 있어 가장 뒤에 두는 원칙이 바람직하다. 그런 차원에서는 ‘코로나 국채’를 발행해 민간의 코로나19 손실에 따른 빚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을 적극 고려할 만하다. 필자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와 특고, 자영업자 등 잠재적으로 피해가 집중된 계층을 대상으로 국세청을 통해 인별 손실액을 확정해 그 손실액만큼 지원하거나 부채를 탕감하는 국가적 대책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기획될 수 있기를 바란다. 틀림없는 사실은, 코로나19 손실과 빚을 해결하려면 향후 당분간 과감한 적자재정이 불가피할 수 있음이다. 증세 논의의 지연을 핑계로 지출을 미룰 일은 아니다. 여야와 정부는 추경 논의를 지금 시작해야 옳다.
정부는 또한 산업전환기 산업정책과 고용정책을 정비하는 과제에도 직면해 있다. 디지털·에너지 전환에서 인프라 조성 및 고용안전망 확충을 위해 정부가 돈을 더 써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특히 내연기관 자동차나 석탄 화력발전 부문에서는 일자리 보호와 직무 전환을 위한 지원이 시급하다. 사회공공성 가치의 재발견이야말로 코로나19가 일깨워준 교훈이었음도 우리는 기억하자. 기간산업, 돌봄 및 보건의료, 공적자금 투입 사업장 등에 대한 공적 소유 확대가 대안으로 검토될 수 있다.
혹자는 확대재정이 거시경제 위험을 키울 수 있음을 경계하며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IMF가 각국의 미래 국가채무비율을 비교한 바에 따르더라도 한국은 2026년 말 66.7%로 같은 시점 선진 35개국 평균 118.6%의 절반을 살짝 웃도는 정도에 그친다. 국가채무비율 상승이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린다는 주장도 조심히 따져야 하는데 예컨대 2000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상승했지만 신용등급은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적극적인 재정운용으로 경제 역량의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재정운용이 초래하는 ‘축소 균형’의 거시경제 위험은 파멸적이다. 섣부른 재정건전화로 당면한 국가적 과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때를 놓치면, 두고두고 경제에 짐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년 전 IMF의 한 연구에서 24개 선진국 가운데 가장 적은 비용으로 적자국채를 지속해서 쓸 수 있었던 나라로 한국이 꼽힌 결과는 씁쓸했다. 역설적이게도 기재부의 그간의 보수적인 재정운용은 낭비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