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민주주의 뿌리가 썩고 있다

2022.06.11 03:00

동 대표로 뽑혀 1년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지냈다.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라서 민원이 많았다. 마을 코앞에 야적장이 들어선다 하고, 아파트 옆길에는 화물차량들이 질주하고, 중앙차로 시설은 개통을 미룬 채 방치되어 있고…. 현안을 받아드니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사안마다 군상들의 이해가 엉켜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가면 속의 탐욕과 위선이 보였다. 낙담했지만 그래서 세상물정에 눈을 뜨기도 했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크고 작은 일들로 주민들과 관청을 찾아갔다. 공무원들은 민원인을 정중하게 맞았지만 일처리는 도식적이었다. 말투도 메말라 있었다. 민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공무원의 나라’ 한국에서 공무원들의 ‘민원 굴리기’는 달인 수준이었다. 우리는 차츰 지쳐갔다. 고양시의회를 찾아가도 의원들의 반응은 그저 뜨뜻미지근했다. 무력감이 밀려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체구의 시의원을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다른 시의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답변이 상투적이지 않았고 체구와 달리 섬세했다. 현안마다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도 짚어냈다. 명쾌하고 진지한 설명에 설복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환해졌고 나중에는 웃음이 나왔다. 바로 박한기 시의원이었다.

그는 일머리가 뛰어났으며 일을 겁내지 않고 즐겼다. 자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연락을 하게 됐고, 그때마다 그는 경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의 조언으로 될 일과 안 될 일이 분명해졌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민원인에게는 구원병이었고, 상처를 받은 주민에게는 의무병이었다. 시·도의원 초청 주민설명회가 열리면 그의 독무대였다. 현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니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아, 이런 시의원도 있었구나.’ 만일 ‘박한기당’이 생긴다면 입당하고 싶어졌다.

그는 당연히 시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3명을 뽑는 선거구에는 민주당 2명, 국민의힘 2명 그리고 정의당 후보 1명이 출마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정의당이 고전하겠지만 박한기만은 될 것이다.” 하지만 박한기 후보는 낙선했다. 그는 그를 아는 사람에게만 ‘일 잘하는 의원’이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대 양당 밖의 후보에 불과했다. 먹자골목에 미니광장을 만들고, 산책길에 바닥조명을 설치하고, 저류장을 놀이터로 조성한 것들이 그의 아이디어로 이뤄졌음을 주민들 거의가 몰랐다.

우리는 빼어난 일꾼을 잃었다. 지역언론도 의외의 결과에 놀랐는지 기사 행간에 아쉬움이 배어있다. “3인 선거구인 나 선거구에 출마한 박한기 후보의 경우 의정활동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현역 시의원인 만큼 당내에서도 내심 재선을 기대했지만 거대 양당 후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9.05%(3028표)를 얻는 데 그쳤다.”(고양신문) 고양시의회는 거대 양당이 독차지했다.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 아닌 정당에 투표한 결과이다. 앞으로 시의회는 당리당략을 앞세운 진영논리가 활개를 칠 것이고, 지역의 다양한 의견은 문밖에서 맴돌 것이다. 이는 민초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표를 통해 실생활을 변화시켜보겠다는 풀뿌리민주주의의 본령이 아니다.

전국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늘어나고, 공천을 둘러싼 추문과 비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중앙당과 지역위원장들이 공천을 미끼로 예비후보들을 줄 세우고 갑질을 하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공천이 곧 당선이니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충성경쟁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곳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한 독버섯들이 피어날 것이다. 중앙당이 하부조직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민심에 대한 두려움은 엷어지고, 오히려 민초들을 관리하려들 것이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풀뿌리민주주의는 그 뿌리가 썩어가고 있다. 이럴 바에는 기초의회 의원의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

언론은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에 현미경을 들이대지만 풀뿌리가 훼손되고 있는 현장은 망원경으로 대충 훑어볼 뿐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다. 이제는 말에서 내려 오염된 정치생태계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양당의 담합과 뒤틀린 선거제도에 가슴을 치는 또 다른 박한기 후보가 많을 것이다. 현실이 척박해도 용기를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도한 정치판이 더럽다며 떠나지 마시라. 언젠가는, 아니 머잖아 바람보다 먼저 풀들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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