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앞에서

2022.07.30 03:00 입력 2022.07.30 03:01 수정

회전문 앞에서 잠시 멈춰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회전문 속도와 내 보폭이 어긋나거나 갑자기 멈춘 회전문에 갇히거나 문에 끼인 적이 많기 때문이다. 회전문이 비장애인인 나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장애인이거나 어린이나 노약자라면 더욱 난감할 것이다. 성인·남성·비장애인이라는 표준에 맞춰진 세계에서는 ‘회전문’과 같은 제약이 많다. 그래서 때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이준호처럼 함께 ‘왈츠’ 스텝으로 회전문을 통과하도록 돕는 동료 시민이 필요하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오수경 자유기고가

우영우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한다. “회전문의 장점은 외부와 내부의 공기 흐름을 완전히 격리한 상태에서 통행자의 흐름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에요. 냉방과 보온에 유리하죠. 하지만 일반적인 문보다 통행량 처리 속도가 느리고, 어린이나 노약자가 문에 끼일 수 있으며, 휠체어 사용자가 이용하기 어려워요. 장점은 하나인데, 단점은 세 개죠. 건물주를 설득하면 회전문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회전문이 ‘왜’ 존재하는지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함께 회전문을 통과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아예 문을 바꾸는 등의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며칠 전에 본 칼럼이 잊히지 않아서다. 필자는 우영우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공감하겠지만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방식까지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단정했다. 무슨 근거로 그리 썼는지 짐작은 간다. ‘사랑스럽고 무해한 약자’는 환영하지만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약자’는 민폐라 여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OOO가 허락한 장애인 운동’처럼 말이다. 그 칼럼을 읽고 씩씩대다 질문을 바꿔보았다. 우영우가 장애인이란 이유로 고용 차별 당한 것에 항의하며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나선다면, 우영우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지하철 출근길 투쟁에 합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좋아하는 우영우와 차별금지법·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들은 과연 다른 존재인가?

어떤 이는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를 두고 그 옆문으로 빠져나가며 한심해 하지만, 누군가는 발걸음을 돌려 그가 무사히 문을 통과하도록 돕거나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문을 통과한다. 우리는 그런 실천을 ‘연대’라 부른다. 그리고 어떤 연대는 함께 문을 통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며 ‘회전문을 없애면 어떨까?’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회전문’ 앞에 멈춘 이들을 위해 문화와 제도가 개선되도록 싸운다. 그런 이들이 연대하여 이룬 성취를 우리가 ‘당연한 권리’로서 누리는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딜레마를 직면하게 한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를 ‘판타지’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인을 현실에서 함께 존재하는 동료 시민으로 보지 않고 각자의 편견대로 ‘판타지’화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던 자폐인이자 작가 짐 싱클레어의 말처럼 드라마가 구현한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장애인을 향한 판타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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