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모르는 이들의 결핍

2022.10.12 03:00 입력 2022.10.12 03:01 수정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늘 에너지 넘치는 오랜 친구가 있다. 연고주의 팽배한 사회에서 별다른 학맥·인맥 없이 오로지 성실성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룬 데다, 과도한 욕망이나 허영도 없고 부모님 봉양과 가족 돌봄도 남다르다. 한길로 달리기보다는 샛길과 골목길에 흥미가 많은 나와는 참 다르지만, 달라서 잘 맞고 배울 점도 많은 사람이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그런 친구가 얼마 전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이야기했다. 즐기는 사교모임에 자주 오는 여성이 있는데, 늘 남들 신세만 지며 먹고 놀다 간다는 것이다. 평소 인색하거나 없는 사람 무시하는 인격이 아니라 처음엔 함께 호응했지만, 듣다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혹시 우울 증세가 없는지 물으니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고 한다. 열심히 나오기는 하지만 그리 즐기는 모습도 아니고 무력해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 여성이 우울증이라면, 공짜로 얻어먹거나 분에 넘치는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해도 전혀 즐겁지 않지만, 그마저 하지 않고 고립되어 있으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극심한 우울증은 슬퍼하거나 분노할 기력조차 없을 만큼 생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 일상적인 삶조차 어려울 수 있다고. 이해하기 힘들고 주위 사람들도 불평하겠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다행히 긴 세월 신뢰가 쌓인 관계인 친구는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정신과 생활이 건강한 사람은 이상적이다. 타인도 자신도 해하지 않고 늘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이들 덕에 세상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니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바르고 올곧게만 살아온 이들은 강자들이 구축한 세계의 질서와 원칙에 취약한 이들이 살아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등생 부모일수록 자녀의 부족함이나 작은 일탈에도 엄격하듯이, 경험의 한계로 인해 자신과 같지 못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배타성을 보이게 된다.

음지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여성들의 미투가 터져나오던 시기.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자기관리 수준과 원인 제공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는, 평소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잘 보호해 온 씩씩한 여성들이나 강한 권력을 가진 노력형 여성이 많았다.

일베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외로 유복한 집안에서 잘 자란 엘리트들이 많은 이유도 비슷하다.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은, 개인의 우수성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후진국가 국민의 비애, 기회에서 배제된 지역민, 빈민들의 분노, 약자와 소수자들의 두려움, 심신이 취약한 이들의 무기력함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저 게으른 무임승차자들로 판단하고 혐오한다.

별다른 일탈 없는 학생으로 크게 주눅들거나 소외된 적 없이 살아왔던 나의 성장 환경상, 사회에서 비슷한 권력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속에서 좌절과 우울을 극복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런 나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극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이들을 다양한 심리치료와 봉사현장 속에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 역시 타인의 나약함을 질타하고 쉽게 단정짓는 우를 저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토지>의 저자 박경리 선생은 “비애를 모르는 인간은 돼지와 같다”고까지 얘기한 적이 있다.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찬 세상을 도외시하고, 다 죽어도 나만 잘사는 세상을 희망으로 바라보는 것은 망상”이라고도 했다. 개인과 사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가장 심각한 결핍은, 비애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망각한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연민의 결핍”이다. 나치를 비롯해 역사 속 무수한 약자 배제·조롱 행위는 자신의 우수성, 성실성에 대한 과신과 선민의식에서 시작된다. 그늘 없는 우등생들을 유난히 선망하고 지지하는 사회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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