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이 무너진 나라

2023.02.27 03:00 입력 2023.02.27 03:01 수정

지난해 여름이었으니 6개월쯤 전 일이다. 검찰 고위간부 출신 변호사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정순신 변호사가 차기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유력하다는 것이었다. 검사 출신이 한창 이 자리 저 자리 꿰차던 때인지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 국수본부장 인선을 6개월이나 앞둔 때였는데 벌써 후임자를 낙점했다는 게 상식적이지 않았다. 또 아무리 검찰 정권이라도 그렇지 검사 출신을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내리꽂는 무리수를 두겠는가 싶었다. 더구나 정 변호사는 한동훈·조상준·이복현 등 다른 ‘윤석열 사단’ 검사들처럼 수사력이 특출난 편도 아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하도 검사 출신을 요직에 발탁하다 보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구나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지난 1월 정 변호사가 국수본부장 공모에 지원하는 것을 보고 지난여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경찰 출신인 다른 지원자 2명은 언뜻 보기에도 약체였다. 윤 대통령은 정말로 오래전부터 다 계획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 아는 바다. 요식에 불과한 심사를 거쳐 지난 24일 정 변호사는 국수본부장에 임명됐고, 임명장에 찍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25일 아들 학교폭력을 둘러싼 추문으로 물러났다.

처음부터 특정인을 앉히려고 마음먹은 인사였으니 검증인들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다. 실명을 쓰지 않았달 뿐 KBS가 정 변호사 아들 학폭 사건의 전말을 처음 보도한 게 2018년 11월이다. 서초동 검사들은 정보, 특히 동종업계 종사자 정보에 민감하다. 비실명이라고 해도 방송 뉴스에 나올 정도면 어지간한 검사들은 ‘그 검사’가 정순신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윤 대통령,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정 변호사의 사법연수원 27기 동기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었다. 한 장관부터 대통령실 복두규 인사기획관, 이인모 인사비서관,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까지 현 정부 인사·검증 라인은 죄다 검찰 출신이다.

인사 문제에서 유독 고집이 센 윤 대통령이 정 변호사의 사의를 즉각 수용한 것은 적어도 이번 인사검증은 실패했다고 자인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인사검증 실패’라는 말은 모호하다. 정 변호사 건의 경우 알고도 적당히 넘어가려다 문제가 드러나 사달이 난 경우일까,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가 나중에 문제가 불거져 논란이 된 경우일까. 전자라면 직무유기이고 후자라면 무능인데, 나는 전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임명하는 이도, 임명되는 이도, 검증하는 이도 모두 검사 출신인 폐쇄적 회로의 해악, 검사 전성시대의 끼리끼리주의와 온정주의, 내 식구 감싸기라는 그릇된 습속, 견제와 균형의 상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검찰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지던 것들이다. 검찰주의가 국정운영 원리로 고양되다보니 검찰의 폐해가 국정운영 차원의 폐해로 확대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사실을 적시하는 어휘가 되고 만 검찰공화국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무너뜨린다는 데 있다. 그야말로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례도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21일 국회에서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관여 의혹 수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면조사를 한 걸로 알고 있고, 당시 변호인단은 조사를 받고자 했는데 검찰이 안 불렀다. 조사를 하면 처분을 해야 하는데, 증거가 없어서 조사를 하면 할 수 있는 게 무혐의 처분밖에 없으니까 못한 걸로 이해하고 있다.” 확신에 찬 단정적인 어투였다.

통상 국회에 출석한 기관장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넘어가는 것과 사뭇 다른 태도였다. “변호인단은 조사를 받고자 했는데 검찰이 안 불렀다”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팩트의 영역이고, 이 원장은 이 사건 수사라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원장이 어디서 저런 말을 들었는지 궁금하다. 당시 수사팀이 “김 여사 측이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출처가 그쪽은 아닌 것 같다. 혹시라도 김 여사 변호인 측 말을 듣고 저렇게 발언했다면 매우 부적절하고 오만하다. 이 원장은 지금 ‘나까무라 스미스씨’ 운운하며 현직 총장을 비난하던 다혈질 검사가 아니라 모든 금융시장이 그 입을 주시하는 금융감독기구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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