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의 분단과 갑갑한 자화상

2023.07.25 03:00 입력 2023.07.25 11:11 수정

[신주백의 사연史淵] 불가항력의 분단과 갑갑한 자화상

반탁·신탁의 대립 즈음부터
38도선 이남은
민족 대 반민족 구도서
친공 대 반공이란
이념 대결 사회로 급변했다
그로 인해 누군가
초당파적 단결을 호소해도
신국가 건설 움직임은
소그룹별 각자도생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이 구도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전협정 체제가
70년간 지속되는 이유를
자성적 성찰 하지 않는
자화상이 재현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 150여년 역사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경험이 두 차례 있었다. 열강이 1904~1905년 러·일 전쟁을 거치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한반도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한 적이 있었다. 통감부는 그 결과일 뿐이었다. 또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국제 공동 관리를 하다 독립시키겠다고 자기들끼리 결정했다. 이후 한반도 역사는 그때마다 열강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도 같았다. 두 차례의 역사적 경험에 관여한 열강은 지금도 한반도 미래를 좌우할 국가들이다. 더구나 그때보다 더 강해져 대한민국도 모르게 분단된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다. 민족의 자율적 생존공간이 그때보다 더 제약받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국 사회는 그동안 식민화의 원인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지적해왔다. 분단의 원인으로 미국과 소련 간 경쟁과 냉전을 주목해왔다. 외부의 규정력을 더 강조하는 시선에는 한반도 구성원이 상황을 관리하거나 열강을 견제할 수 없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처럼 비슷하게 반복되는 운명은 내부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바뀌기 시작하다 전략적 지위(관계)가 변할 때 와서야 결정적으로 전환된다. 압도적 규정력에 미세한 충격을 주면서 민족의 자율적 생존공간을 조금이라도 넓혀갈 여지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풍토인 우리 안의 제한성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폴란드 문제와 한반도 문제

해외 독립운동가 가운데 1943년 12월 카이로회담 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한반도를 여러 나라가 공동 관리한 후에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연합국이 정해준 미래를 아는 사람이 많았다. 충칭과 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는 연합국이 해방시킨 점령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큰 관심을 두었다. 특히 폴란드 문제가 ‘극동의 폴란드’인 식민지 조선의 미래를 예측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했다.

1939년 9월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인은 즉각 망명정부를 세웠다. 망명정부는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고, 1941년 소련과 외교관계도 맺었다. 1943년 12월 테헤란회담에서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관심은 정부 수립 문제로 옮겨 갔다. 1944년 들어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해 루블린을 점령하고 민족해방위원회를 설치했다. 소련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동유럽에 수립한다는 방침에 따라 위원회를 바르샤바임시정부로 바꾸고 1945년 1월 승인했다. 이때가 얄타회담 1개월 전이었다.

충칭의 독립운동가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처한 불행한 처지를 보면서 큰 우려감을 드러냈다. 가령 김구는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으려는 소련이 폴란드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법, 즉 망명정부에 대립하는 임시정부를 조직한 소련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 측과 경쟁하는 임시정부를 고려인으로 구성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44년 9월 그는 이를 타개하는 한 방안으로 중국 측 원조로 국내외 조직을 신속하게 튼튼히 하고 연계를 강화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장제스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임정 측은 런던의 망명정부나 루블린의 임시정부와 비교해 큰 약점이 있었다. 장제스도 1943년 7월 김구와 면담할 때 요구했듯이 전쟁 과정에서 뭔가 내세울 만한 성과가 부족했다. 그래서 충칭의 독립운동가 사이에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전쟁에 도대체 어떤 기여를 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비판자들은 1945년 2월 신한민주당을 결성하며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이들은 그래야 런던의 망명정부처럼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들은 얄타회담에서 소련과 미국, 영국이 루블린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느냐를 놓고 대립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얄타회담에서 3국은 모스크바위원회를 설치하고 참가자를 선정해 과도정부를 세우며 선거로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1945년 6월 3국 모스크바위원회가 인정한 12명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폴란드 과도정부가 출범했다. 과도정부는 소련 지원을 받는 임시정부 출신자들이 장악했다. 아무리 압력을 넣어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폴란드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미국과 영국은 과도정부를 승인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군사 점령의 정치성이 여기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비슷한 일이 전개되면 임정 측은 n분의 1에 불과하므로 독보적 지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충칭의 독립운동가들이 카이로회담 이후부터 장제스가 말한 성과를 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가령 국제 공동 관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했다든지, 광복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든지, 이념을 불문하고 다른 곳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다든지 등을 확인할 수가 없다. 또 폴란드 문제를 집중 검토한 것 같지도 않다. 가령 망명정부와 임시정부의 차이는 무엇인지, 소련이 그렇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 그때마다 미국과 영국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등을 살핀 것 같지 않다.

■ 연합국의 견고한 방침과 할거 정치 세력

그래도 충칭의 독립운동가는 국내에서 버티던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국제 정세를 잘 인지한 편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을 회고한 안재홍은 해방 직후까지도 얄타회담이 있었음을 모를 정도였다. 오히려 한반도의 미래를 현실적으로 상상해볼 기회조차 없이 막판에 학살당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더구나 해방 시점에 조선에는 이렇다 할 독립운동 단체 하나 없었다. 하여 국내의 경우 누가 지도자인지 자격을 말하기가 좀 복잡했다.

이런 현실에서 소련군은 8월 말 38선 이북 전체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은 9월9일 서울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38선 이남에서 군정을 행했다. 두 강대국이 합의한 38도선을 경계로 확고한 군사력을 갖춘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것이다. 이즈음 국내 독립운동가도 한반도 신탁통치 방침을 충분히 인지했다.

10월14일 소련의 후원을 받는 김일성이 평양 시민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당 조직과 행정 계통에서 권력을 장악해갔다. 한편 10월16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과 하지 미 군정 사령관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이 도쿄에서 귀국했다. 세 사람은 반소·반공·반탁 입장에 선 남한만의 행정부를 임정 측과 함께 수립할 계산이었다. 이승만은 그 일환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자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회합을 주선했다. 조선공산당도 참여했다.

하지만 중앙집행위원을 선정할 때 균형을 맞추지 못해 조선공산당 세력이 이탈했다. 친일파를 제외한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조선 즉시 독립, 38도선 철거, 신탁통치 절대 반대라는 총론에 모두가 공감했지만, 각론의 자리 만들기에서 틀어진 것이다. 통일단체를 조직하기 전부터 벌어진 주도권 경쟁에 이념 차이가 원인이었다. 그만큼 외적 조건에 대한 위기의식도 절박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임정 측도 자신들이 ‘정부’이므로 협동할 필요가 없고 법적인 연관성도 없어 참여하지 않았다. 미 군정과 이승만의 구상은 일단 좌절되었다.

임정 측은 ‘정부’로서 독자세력화를 모색했다. 때마침 신탁통치 최종 합의안이 알려졌다. 임정 측은 12월28일부터 “새 출발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며 반탁을 주도했다. 이를 기회로 임정을 확대·강화해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국민대표대회를 거쳐 정식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미 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부정하는 쿠데타였다. 연합국 결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승부수였다.

한편 이승만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침묵으로 일관하다 1월10일쯤을 지나며 반탁을 전면에 내걸고 재차 자기 세력을 꾸려갔다. 반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3상 결정 절대 지지’를 내세우며 세력화에 나섰다.

이즈음부터 38도선 이남은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에서 친공 대 반공이란 이념 대결 사회로 급속히 바뀌었다. 좌우 대결을 조장한 이는 바로 우리였다. 누군가 아무리 초당파적·초계급적 단결을 호소해도 신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소그룹별 각자도생에 불과했다. 강한 외적 규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민족의 자율적 생존공간을 확보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져갔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이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호국과 보훈을 크게 강조하는 데 반비례하게, 정전협정 체제가 70년간 지속되는 우리 안의 이유를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자화상이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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