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에는 역사와 관련한 사상과 대중파시즘으로 가는 방향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럼에도 모든 죄악의 근원과 책임을 히틀러의 ‘단독죄책론’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단선적 역사관에 빠지면 대중파시즘에 동조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되레 면책을 줄 수도 있다
청소년 시절에 친구나 선배 집에 놀러 가면 문학, 사상, 인물에 관한 글을 모은 전집(全集)이 거실 장식장에 빼곡히 진열된 경우를 자주 본 기억이 있다. 비싼 전집류 구입은 경제성장으로 폭넓게 형성된 도시 중산층의 교육열, 과시 욕망과 연관이 깊으며, 지적 허기짐을 일거에 메워 주는 방법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경까지 좀 잘나간다는 출판사들은 이때를 기회 삼아 회사의 운명을 걸고 전집류를 기획하여 외판 영업에 뛰어들었다.
출판사들은 대체로 한국과 세계로 전집류를 구분했다. 물론 이때의 세계는 동북아시아 이외의 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를 제외한 ‘서구’를 의미했다. ‘세계○○전집’은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압축한 기획물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누가, 어떤 글이 시리즈물에 포함되었는지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요즈음 표현을 빌리면 뜨악했다고 할 만큼 낯선 시리즈물이 하나 있었다.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뚜렷한 비판의식을 갖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이 살인마, 독재자의 글이 왜 포함되어 있지?’라는 막연한 반문의 수준이었다.
1. 한때는 존경받은 영웅의 서사책
그런데 이 책이 90년 넘게 한국인 사회에서 유통된 데는 나름의 맥락이 있었다. 한국인은 이 책의 내용을 1933년에 처음 접했다. 1925년 간행된 제1부의 일부만 소설가 이광수가 운영하던 동광사에서 한글로 번역해 간행했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어 번역서로 내용을 접했다. 그들에게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애국 영웅이었다.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파 박석윤은 히틀러를 ‘천재적 영웅’이라 추켜세웠다. 1940년 9월 시점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함상훈은 일개 “군조(軍曺)로부터 투쟁을 통하여 현지위(現地位)를 획득한 만큼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독일 국민 천년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선 총통의 사명은 중차대하다. ‘앵글로·색슨’족의 세계 제패를 꺼구러 트림에 성공할 날을 기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영웅 히틀러가 연합국 영국의 세계 제패를 저지해 주길 기대했다.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침략자들의 파시즘 연대를 구성하고 있던 독일이 승리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들보다 훨씬 젊은 세대인 청년학생도 히틀러를 영웅으로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1940년대 항일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은 혹독한 탄압과 고난을 극복했던 진정한 영웅의 고난극복기(記)로 <나의 투쟁>을 취급했다.
언뜻 보면 히틀러를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웅의 역할을 놓고 결정적으로 달랐다.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한 청년학생은 독일의 승리, 곧 일본과 함께하고 있는 침략국의 승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영웅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독일 민족을 구했듯이 일본을 패전으로 이끌어 조선 민족을 구하는 영웅, 곧 독립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망론의 입장에서 이 책을 탐독했다.
이와 크게 다른 시선도 있었다. 히틀러를 일본 천황의 ‘장형(長兄)’쯤으로 간주하며 초록은 동색처럼 취급하거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원봉처럼 ‘침략자’라고 명확히 규정한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이들에게 이 책은 침략자의 자기변명서일 뿐이었다.
2. 또 한때는 민주주의 파괴자의 자서전
그런데 1945년을 지나며 히틀러와 <나의 투쟁>에 관한 시선이 확 바뀌었다.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히틀러를 독재자, 나치를 전체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 파시즘 세력과 싸워 승리했다. 유대인 학살의 진상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히틀러는 숭상하고 싶은 영웅이 아니라 침략자, 살인마라며 배격해야 할 대상이었고, <나의 투쟁>이란 회고록은 그와 나치의 독재를 정당화한 변명서였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1950년대까지도 한글 번역서가 없었으니 읽었다고 하더라도 주로 일역서였다.
첫 한글 번역서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전에 발행되었다. 번역자는 정국이 어지러우니 “차라리 유능한 독재자라도 출현했으면 하는 심정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진단하고, 독재자라도 출현하기를 갈망하는 그들의 “미몽(迷夢)을 깨워 주는” 의미에서 번역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번역자가 보기에 독재자는 선악으로 분류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며,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압하며 자신의 야망만을 달성하려는 백해무익한 존재였다. 이렇듯 한글 번역본은 독립운동가의 시선을 이어받고, 해방 직후부터 정착된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의 자서전’이라는 시선으로 4·19혁명기에 간행되었다. 무언가를 계승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1961년 번역판은 발행 3개월 만에 제3판을 찍을 정도였고, 그해 비소설 부문에서 가장 많이 팔릴 만큼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여기에 연관된 리더십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지대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마찬가지 관심은 반독재 정치 민주화를 제도로 실현하려는 정치 과제가 계속되었던 1987년 6·10 민주화운동쯤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그사이 약 30년 동안 무려 15명의 번역자가 각각 번역했다. 이는 위해서(危害書)라도 이윤이 남으면 발행한다는 극단적인 출판상업주의 경향이다.
3. 한쪽으로 치우친 피상적 이해의 한계
대부분의 번역서는 한국적인 이유만을 피상적으로 내걸며 출판을 정당화했다. 사상에 대한 검토는 차치하고 틀린 사실이 많은 자서전임에도 사실을 검토한 번역서가 한 권도 없었다. 해제라는 이름으로 딱 한 권의 번역서만 독일 민족지상주의, 반유대주의, 반마르크시즘이 이 책의 근본 사상이라고 간략히 분석했다(역자 황성모). 독재와 반독재의 구도 속에서 히틀러라는 사람의 상징과 추상적인 역사 이미지를 소환했다고 내세우는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면 텍스트와 그것의 맥락에 담겨 있는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보편적 가치의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는 사이 마치 럭비공 튕기듯 종잡을 수 없이 이 책이 소환되었다. 인간의 생명과 관련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은 채 나치의 군사전략을 분석할 때 참고하거나, 명장, 악인, 위기 극복 등의 측면에서 리더십 교본으로 제시되었다. 군사 경영 분야에서 효율성만을 신화화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 또한 ‘말’을 ‘글’보다 앞세운 혼이 없는 글의 사례로 취급되거나, 김정은이 책의 내용을 숙독하도록 지시했다면서 북한이 진정성 없는 남북 대화쇼를 한 증거라고까지 인용되었다. 대학입시 논술에 대비하는 모의 문제에서도 한국 민족주의의 진로를 묻는 지문으로 일부 내용이 소개되었다. 심지어 자기검열로 이어진 예도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편집한 사람들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떠올라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을 책의 부제로 할지를 놓고 잠시 주저했을 정도다.
결국 한국 사회는 오늘에 와서까지 <나의 투쟁>이라는 위험한 자서전을 비판적으로 독해하여 자기 맥락 속에서 성찰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기회를 만들기 위한 전제의 하나는, 나치가 당시의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준수한 채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며, 이때 가장 큰 힘이 된 존재는 독일 국민이었다는 시선이다. 나치는 독일 국민이 일상에서 사회적 평등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고, 게르만 민족만의 새로운 질서와 윤리를 만든다는 주관적인 혁명의지를 갖게 했다. 유대인이라는 확실한 ‘적’을 만들어 반발을 거의 받지 않고 수직적 위계구조를 만들고 내부의 단결도 공고히 해 나갔다. <나의 투쟁>에는 이러한 역사와 관련한 사상과 대중 파시즘으로 가는 방향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럼에도 모든 죄악의 근원과 책임을 히틀러의 ‘단독죄책론’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단선적인 역사관에 빠지면 대중 파시즘에 동조한 다른 모든 사람(세력)에게 오히려 면책을 줄 수도 있다. 또 한국적 맥락, 예를 들어 민주주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아 놓고 그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크게 훼손하거나, 다문화 사회로 갈 때 필수 전제인 개방성에 동반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 문제를 반면교사할 성찰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