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방에서는 뭘 먹을까

2023.10.12 20:19 입력 2023.10.12 20:23 수정

거지와 도둑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기피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두 직업은 욕으로 자주 쓰인다. 활용도 면에서 단연 거지가 앞선다. 질이 낮은 물건을 지칭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거지 같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끔 ‘그지’라는 말로 변형되거나 앞에 ‘개’나 ‘땅’ 같은 단어가 붙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거지’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카카오톡의 오픈채팅방에서 ‘거지방’이라고 검색하면 100여개 채팅방이 검색된다. 구글에서는 127만개 동영상이 검색된다. 젊은이들은 채팅방에 자신의 아이디를 ‘개그지’ ‘백년거지’로 쓰기도 한다. 스스로를 거지로 낮추면서 젊은이들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거지방에 모인 이들은 자기의 씀씀이를 공개하고 절약법을 공유한다. 가령 한 멤버가 단톡방에 “오늘 저녁, 제육덮밥을 시켰습니다”라고 톡을 올리면 다른 회원들이 바로 “생일입니까?”라고 반박한다. 또 누군가 “립 틴트를 사고 싶어요”라고 하면 “입술을 꽉 깨무세요”라는 대답이 붙는다. 거지방의 묘미는 절약 노하우보다 이런 해학에 있다. 이런 기상천외한 대화는 거지방을 “숨만 쉬어도 100만원이 깨진다”는 고물가 시대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거지방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음식이다. 오마카세나 스타벅스 같은 비싼 음식만 공격받는 게 아니다. 생수도 배달음식도 조롱의 대상이다. 대신 수돗물이나 구내식당(혹은 학생식당)을 이용하라고 한다. 심지어 소비 유발 음식 사진을 올리면 강제퇴장당한다. 도시락처럼 자신이 만든 음식은 예외다.

거지방에서 음식에 열을 올리는 것은 생활비 중 쉽게 줄일 수 있는 게 엥겔지수여서다. 청년들이 생활비를 줄이려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계속된 고물가 탓이다. 특히 외식비는 올해 8월까지 27개월 연속 올랐다. 한 달 새 10%나 오른 달도 있었다. 반면 청년 체감 실업률은 20%가 넘는다. 청년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고통은 전 연령층 가운데 가장 극심하다.

청년들은 거지방 가르침대로 수돗물, 봉지커피, 삼각김밥, 구내식당에 기대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런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거지방을 만들어 SNS를 통한 연대와 공감으로 현실을 견디고 있다. 해학으로 가득 찬 거지방이 때때로 안타까운 까닭이다.

거지방에선 잘 언급되지 않지만 청년들에게 가장 절망적인 것은 집값이다. 대부분 원룸 등에서 월세 사는 청년들의 주머니 사정을 비웃듯이, 올해 9월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3억원이었다.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이런 아파트를 사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청년에게 거주의 계층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것이다.

삼다수나 스타벅스는 답이 없는 절망적 상황을 희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이 가당키나 할까? 거지방에서 밥 타박은 있어도 집이나 결혼 타박이 드문 까닭이다. 거지가 밥은 먹어도 방은 없는 게 진짜 현실이다. 청년들에게 쾌적한 자신의 집에서 따뜻한 저녁 한 끼니는 이번 생에서는 이루기 힘든 사치인 것일까?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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