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 빠진 극장형 정치

2023.11.30 21:10 입력 2023.11.30 21:11 수정

일본에 ‘극장형 정치’라는 게 있다. 정치를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연출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수법이다.

이를 잘 써먹은 정치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꼽힌다. 그는 거의 매일 TV에 나와 정치쟁점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선악 구도를 짜 자신을 투사처럼 보이게 했다. 외신 인터뷰 중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르는 등 퍼포먼스에도 능했다.

고이즈미의 정치적 제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도 못지않았다. 일왕 교체나 도쿄 올림픽 개최 등 각종 이벤트를 정권 부양에 활용했다. ‘하고 있는 느낌’을 연출하는 데도 뛰어났다.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던 그가 돌연 ‘전제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공언하던 걸 기억한다.

극장형 정치는 기존 정치구조를 뛰어넘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성의 있는 설명은 뒷전이다. 근본 문제 해결을 미뤄 국가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일본 국민이 고이즈미의 극장형 정치에 열광하는 사이 일본 경제는 더 나빠졌다.

굳이 일본 얘기를 꺼낸 건 최근 여권의 모습이 겹쳐 떠올라서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차분한 변화’ 주문에 호응하듯 등장한 게 인요한 혁신위원회다. ‘파란 눈의 의사’ 혁신위원장 이미지는 강렬했다. 누군가는 그가 여권의 환부에 메스를 대는 모습을 상상했을 법하다. 여기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옆집 아저씨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인 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도 그렇게 크게 자랑할 게 없다”고 했을 때는 신선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인 위원장의 ‘당 지도부·중진·윤핵관의 총선 불출마·험지 출마’ 처방은 따르는 이가 없다. 나머지 처방도 이미 나왔거나 부작용이 보고된 것들이라 얼마나 받아들여질지 미지수다. 전권 없는 혁신위의 한계였다. 인 위원장이 “날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추천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김기현 대표에게 바로 거절당한 것은 차라리 희극이었다.

게다가 ‘파란 눈의 의사’ 이미지를 한 꺼풀 벗기자 드러난 건 ‘보수 꼰대’의 모습이다. 인 위원장은 “아랫목에서 자라 월권하지 않는다”며 당·대통령실 관계 재정립 요구에 선을 긋더니 윤 대통령을 “나라님”이라 했다. 이준석 전 대표를 향해선 “준석이는 도덕이 없다. 그것은 준석이 잘못이 아니라 부모 잘못이 큰 것 같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인요한 극장은 “1인 예능쇼”(김웅 국민의힘 의원)로 조기 종영되는 분위기지만 여권은 꽤 효능감을 느꼈음직하다. 지도부 교체나 수직적 당·대통령실 관계 수정 목소리는 묻혔다. ‘하고 있는 느낌’을 연출한 것도 성과다. 보궐선거 압승으로 긴장을 잃고 ‘승자의 저주’에 빠진 민주당보다는 ‘혁신할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당 지도부와 혁신위의 갈등설이 나오자 김 대표와 인 위원장이 회동한 것도 ‘하고 있는 느낌’을 주려는 것이다. 인 위원장이 유승민 전 의원을 만난 뒤 유 전 의원의 쓴소리는 쏙 뺀 채 “얘기가 잘됐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건 여권이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선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여권은 김포시의 서울 편입론을 꺼내들었다. 보수·진보 정권을 넘어 이어온 국토균형발전을 무시하는 얄팍한 표퓰리즘이다. 이제 여권은 인요한 극장의 흥행이 다하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총선 등판 등 새 이벤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윤 대통령이라는 주연 배우의 인기가 신통치 않으니까 서브 주연을 띄워 시청률을 올리겠다는 속셈이다. 서브 주연이 반짝 인기몰이를 할지 몰라도 드라마는 산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요한 극장이 펼쳐진 사이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한동안 원인 파악도 안 됐던 행정전산망 먹통 사태는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세계 최고의 디지털 정부’를 무색하게 했다. 안보 위기라는데 국가정보원은 내부 권력 다툼으로 날을 새우고, 신임 합참의장은 북 미사일 도발 때 휴대폰으로 주식투자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박빙 승부”라던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은 ‘29 대 119’ 참패로 끝났다. 애초 쉽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던 유치전을 ‘역전승할 것 같은 느낌’으로 키운 건 무엇인가. 새만금 세계잼버리 파행으로 국제적 망신을 산 게 3개월 전이다. 나라 곳곳이 나사가 빠진 것처럼 덜거덕거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국정운영 전반과 당·대통령실 관계를 재점검하고 과감하게 쇄신해야 한다. ‘하고 있는 느낌’만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김진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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