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3년 넘게 남았다

2024.02.08 15:28 입력 2024.02.08 17:43 수정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후 KBS 1TV를 통해 방송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김건희 여사 파우치 논란과 관련해 앵커의 질문을 받고 있다. KBS 방송 화면 캡처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후 KBS 1TV를 통해 방송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김건희 여사 파우치 논란과 관련해 앵커의 질문을 받고 있다. KBS 방송 화면 캡처

지난 7일 밤 방송된 윤석열 대통령의 KBS 대담은 실망감을 넘어서는 감정을 안겨줬다.

대담에서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좀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김 여사가 명품 가방을 수수하고 반환하지 않은 데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나 사과는 없었다. 정치권 안팎에서 예상했던 ‘대리 유감 표명’은커녕 ‘아쉽다’라는 말로 얼버무린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제2부속실 설치나 특별감찰관 임명 등 제도적 보완 방안에도 미온적 반응을 보이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해서 될 일이었으면 김 여사는 왜 ‘조용한 내조’ 약속을 깨고 숱한 논란을 일으켰나.

대통령이 사장 인사권을 행사한 KBS가 진행하고, 사전 녹화된 이 대담이 결국 ‘약속 대련’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불식시키지 못했다. 질의응답 과정에선 ‘명품 가방’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그 자리를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만 백’이라는 기이한 말이 대체했다. KBS 앵커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왜 명품 가방을 명품 가방이라 부르지 못하나. ‘김 여사 성역화’가 명품 가방에까지 미쳤나.

게다가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이나 이태원특별법안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선 질문도 없었고, 언급도 없었다. 그래놓고선 윤 대통령이 직접 대통령실 청사 내부를 소개하는 ‘러브 하우스’ 형식을 대담 중간중간에 끼워 넣었다.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은 피하고, 눈길을 딴 데로 돌리겠다는 의도와 다름없다.

앞서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이번 대담에서 김 여사 논란에 침묵한 이유와 유감 표명 등을 허심탄회하게 밝히면 지지율 회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다. 대선 후보 시절 ‘개 사과’ 논란 때부터 알아봤다. 이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는 전략이 통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나. 윤 대통령을 보좌하는 대통령실 참모들은 무슨 생각인가. 알맹이도 없고, 마지못해 하는 듯한 대담으로는 여론을 돌리지 못한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나마 이번 대담의 성과라면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윤 대통령 개인은 물론, 정권의 본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들 잊었을지 모르지만, ‘0선 정치 신인’인 윤 대통령이 ‘별의 순간’을 잡았을 때 국민들은 그가 기성 정치 문법을 깨고, 이념과 진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정치를 펼치길 기대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취임 후 보여준 모습은 그런 기대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의 친정인 검찰 출신 인사들이 득세했고, 윤 대통령은 ‘이권 카르텔 척결’을 밀어붙였지만, 정작 검찰·법조 카르텔에는 눈을 감았다. 만 5세 초등 입학·주 69시간제 등 즉흥적으로 던졌다가 여론 반발로 취소한 정책도 부지기수다. 장관급 후보자들은 자녀 학교폭력, 극우 발언, 주식 파킹, 안보위기 때 주식 거래 등 다양한 논란에 휩싸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김 여사 특검법안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을 잇따라 거부했지만, 직접 설명은 없었다. 그래놓고 8일 현재까지 10차례 생중계된 국민과의 ‘민생토론회’에서는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극장형 정치’의 전형이다. 윤 대통령이 2030 엑스포 부산 유치에 실패한 뒤 부산 민심을 달랜다며 대기업 총수들을 거느리고 ‘떡볶이 먹방’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대담도 그 연장선이다. 2년 연속 신년 기자회견을 패싱하고 생방송도 아닌 사전 녹화 형식의 대담을 했다. 국민을 대신한 언론들의 날선 질문과 추가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다. 어려운 결정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자꾸 쉬운 선택을 한다. 검찰 시절 몸에 밴, 익숙한 것에만 의존하다간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그건 지난 1년9개월간 국정에서 밑천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30% 안팎을 오간 지 꽤 됐다. 놀라운 건 전 세계 경기 침체 속에 지도자들도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윤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최악의 상황은 미움에 더해 경멸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대통령을 두고 그런 마음을 품는 국민들이 늘어난다면 슬픈 일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김진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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