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꽃시장에서 라일락 모종을 샀다. 봉오리가 많이 달려서 얼마 뒤 연보랏빛 꽃이 활짝 피면 작업실 마당이 향기로 가득할 것 같았다. 딸기의 기는줄기와 잡초를 싹 뽑아 말끔한 맨땅을 만든 다음 라일락 뿌리를 감싼 흙 알갱이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심었다. 2~3일마다 물을 듬뿍 주고 김도 매주었다. 그런데 차츰 잎이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잎말이벌레가 든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원효대사의 지팡이처럼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바랐건만 이내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결국 체념하고 줄기를 잡아당겼는데 마치 흙에 박은 못처럼 쑥 딸려 올라왔다.
잡목은 한 뼘만큼만 자라도 뿌리가 뚝 끊어질지언정 고분고분 뽑히지 않는데 왜 나의 라일락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까? 그렇게 몇달째 고민하다가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를 만났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무는 섬이 아니다”일 것이다. 수잔 시마드는 환금성 수목인 미송의 생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제거 대상이던 오리나무와 자작나무가 오히려 미송에게 물과 당분과 질소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뿌리와 뿌리를 연결하는 수송관은 버섯이라고도 불리고 곰팡이라고도 불리는 균류의 실, 즉 균사였다. 이렇듯 나무뿌리와 균류가 얽혀 있는 관계를 균근이라고 한다. 균사로 연결된 나무들은 호시절에 넉넉하게 거둬 궁핍한 이웃에게 나눠준다.
우리 인간도 균근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치게 많이 벌어들인 소득이 벌지 못한 사람들에게 저절로 흘러 나간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실은 우리에게도 균근이 있다. 제목에서 짐작했겠지만 그것은 바로 선물 경제다. 호혜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향모를 땋으며>에서 로빈 월 키머러는 “선물의 본질은 관계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형의 관계로 이어져 있다. 등가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주고받음은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면 관계가 형성되고 또 다른 베풂을 낳는다. 누군가 내게 선물을 주면 나는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되갚는다. 그렇게 모두가 선물의 끈으로 이어진다.
수잔 시마드는 나무뿌리가 물과 양분뿐 아니라 정보도 주고받는다고 말한다. <향모를 땋으며>를 읽다가 피칸나무들이 어떻게 몇년마다 일제히 열매를 맺는지, 어떻게 나무 한 그루가 나무좀에게 공격받으면 다른 나무들까지 방어용 화합물을 분비하는지 궁금했는데, 실제로 아미노산과 호르몬 같은 물질들이 균근망을 따라 전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에서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는 자당이 세로토닌과 같은 역할을 하며 “나무도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신경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신경세포와 인터넷은 나무에게서 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라비틀어진 딸기의 줄기와 잎이 겨울 화단을 담요처럼 덮었다. 땅 위에서는 생명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지만 땅속에서는 균류가 실을 뻗어 서로 연결된 채 겨우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나. 이듬해 봄 새로운 식물이 뿌리를 내려 자기들과 연결되길 고대하면서. 그나저나 라일락은 내생균근 식물이어서 뿌리 속에 균류를 품을 뿐 다른 뿌리와 연결되진 않는다고 한다. 나의 라일락이 시든 사연은 계속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