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푸는 1896년 <천연론(Evolution and Ethics)>을 번역하며 영어의 ‘롸잇스(rights)’를 권리로 옮겼지만 불만이었다. 권리의 한자 權과 利 어디에도 ‘정당하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정당함은 直이니 권리를 민직이나 천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권리를 말한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이 지적했듯이, 그래서 동아시아에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한 정당성이 취약한지도 모른다.
언론에 대해서도 유사한 문제 제기가 있다. 며칠 전 한국언론학회 전임회장단 오찬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제1공화국 헌법은 제13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규정했고, 이 조문은 우리 공화국의 헌법 제21조에 유전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의 영문판이 확인해 준 언론은 ‘스피치’요, 출판이 ‘더프레스’다.
나는 평소 가졌던 의혹이 당혹감으로 변하는 경험을 했다. 의혹이란 평소 언론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이 어쩐지 시민적 기본권에 속한 발언의 자유에 근거해서 말하기보다 언론매체 사업자의 자유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저럴까 의아했던 느낌이다. 당혹감은 당분간 우리말로 발언, 언론, 언론행위, 언론매체, 출판매체 등을 일관되고 차별성 있게 사용할 것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오찬모임에서 나온 일화도 의미심장하다. 원래 신문학회라 불렀던 학회를 신문방송학회로 개명할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열식으로 부르느니 아예 언론학회로 하자고 제언했지만 이화여대에서 열린 신문학회 총회에서(1981년일 게다) 압도적으로 부결됐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을 당대 학자들의 보수성이나 특정 매체에 대한 의존성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도 없는데, 신문학회는 1968년 이미 학회의 영문명칭을 ‘저널리즘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학회’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문학회는 1985년에야 언론학회가 됐다.
우리말 언론은 3중으로 혼란스럽다. (1) 발언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본원적 소통행위를 지칭하면서, (2) 뉴스를 제공하는 활동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3) 정보를 공유하는 기술과 매체, 그리고 규범과 제도마저 포괄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교하게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언론이라 말하면 오히려 혼란스러운 표현이 되는 경우가 있다. 결국 표현이나 소통과 같은 대안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스피치, 저널리즘, 미디어 등과 같은 외래어로 대체하면 편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된다.
그런데 편안함이 지나쳐 의미적 대혼란에 봉착한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언론은 ‘프레스’라서 그런가, 우리는 간혹 이 기구가 가장 오래된 권리 중의 하나인 발언의 자유가 다른 기본권과 충돌할 때 조화롭게 조정하기 위해 제도화했다는 사실을 잊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방송통신은 ‘커뮤니케이션즈’인데, 애초에 그래서 모든 언론매체가 생산한 내용물을 심의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가 아니라는 의도도 무시한다.
어차피 망한 김에 쉬어가자. 크게 심호흡을 하고 현대적 문명국가의 깨친 자들이라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 보자. 설익게 배운 자들이 모여 용어통일위원회를 만든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처럼 정부고시로 어문규범을 정해서 강제로 통제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내 제안은 일단 개념사에 대한 최소한의 학습을 한뜻 있는 자들이 언론 관련 주요 개념어 사용을 염두에 두고 규칙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근미래에 세계인이 인공지능기반 통역을 이용해서 소통할 수 있다는 조건을 고려하면, ‘번역어로서 모국어’라는 관념을 떠나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본다. 소통과 발언, 그리고 언론에 대해 고민하는 뜻 있는 자들의 제안 참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