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2024.03.04 20:04 입력 2024.03.04 20:12 수정

“왜 왕이나 독재자는 자그마한 불평도 크게 처벌했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의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랬던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면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서면 나는 아닌 척하면서 늘 학생들의 눈치를 본다. 졸거나 딴짓을 하지 않는지 그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내 강의가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는 건가 가늠해보고, 딴짓을 하는 모습에 나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한다. 보통은 약자인 학생이 강사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짐짓 아닌 체할 뿐 나 역시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불안을 느낀다.

진실은 강의실에서 내가 지닌 얄팍한 권위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말에 집중하지 않으면 나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치 권위와 인격을 동의어처럼 느끼면서, 권위가 도전받는 것 같을 때 내 인격이 모욕당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강의실 밖에서 ‘남남’으로 만났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강의실 안에서 난 학생들이 내 강의에 집중하는 게 당연하다 믿으며 내가 뭐라도 되는 양 대접받기를 욕망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몇 시간 동안 떠드는 말에 집중한다는 것부터가 무척 힘든 일인데, 어리석게도 그걸 바라고 있었다.

권위가 위협받는다는 불안은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준다. 학생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권위란 없는 것이다. 반대로 학생들이 내 말에 집중하고 나에게 배울 게 있다고 인정해 주면 그때 비로소 권위가 생긴다. 가르칠 권위는 학생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무리 학생들에게 집중을 요구하고 배울 의무를 강조한들, 배움의 결정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의 선택에 달렸다. 즉, 불안은 내가 누리는 권위의 기초가 나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실은 보이지 않는 권력 투쟁의 공간이다. 학생들을 지식이 부족하고 배워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 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내 욕망과, 졸고 딴짓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학생 사이의 ‘밀당’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권력 투쟁의 결론은, 학생들이 부여해준 권위를 다시 학생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모두 나름의 지식을 갖추고 사유할 줄 알았다. 필요하다면 배우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나는 학생들을 힘껏 믿어주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내게 학생들이 부여해 준 권위를 이용해, 그들이 스스로를 믿고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내가 그들을 믿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강의실의 민주주의’라 부르고 싶다.

학생들이 부여해 준 권력을 마치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기에 갖게 된 것이라 착각한다면, 강의실의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 하물며 보잘것없는 강사인 나도 그러한데, 당대 권력자인 대통령과 야당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입을 틀어막고 쫓아내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잉경호’는 대통령의 오만한 권위의식의 발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편이 아닌 집단을 제거하려는 민주당의 ‘공천논란’은 이재명 대표가 윤 대통령과 별반 다르지 않게 권력에 심취해 있음을 알려준다. 두 권력자 모두 과거 왕이나 독재자가 그러했듯 권력이 본래 자신의 소유물인 양 착각한 채로, 자신에게 이견을 지닌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며 그들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강의실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듯,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해 놓지 않았는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강의를 준비하면서 나에게 주문처럼 되뇌어 본다. 너의 권위는 학생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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