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지금 우리의 반지성주의

2022.03.31 03:00 입력 2022.03.31 03:05 수정
한명식 대구한의대 교수·<나의 바로크> 저자

2016년의 미국 대선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의외의 결과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은 똑소리나게 지적인 힐러리 대신 정반대의 트럼프를 선택했다. 나는 그때 이런 승리가 되풀이된다는 상상을 했다. 스티븐슨을 누른 아이젠하워, 고어와 존 케리를 차례로 이긴 조지 W 부시의 승리가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하버드로 대표되는 엘리트 지상주의와는 상반되는 어떤 의외성이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자면 ‘반지성의 승리’랄까. 아이젠하워의 군인정신에 입각한 근본주의적 반지성, 악의 축을 들먹이며 마니교적 원시성을 드러내는 부시의 반지성은 자신의 물질적 성공을 당당하게 강조하는 트럼프의 속물적 반지성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한명식 대구한의대 교수·<나의 바로크> 저자

한명식 대구한의대 교수·<나의 바로크> 저자

‘반지성주의’는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역사를 개척시대와 실용주의 문화 속에서 지식인에게 가한 체제순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선출된 1952년 선거의 밑바탕에 흐르는 대중의 정서를 반지성주의적 개념으로 포착했다. 그에 의하면 대공황 이후 1930년대 뉴딜은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권력의 중추에 포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2차대전 이후 냉전의 시작과 함께 노동자의 현실과 대조되는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사회를 전복하는 위협 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매카시즘이라는 1950년대 초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은 지식인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사실 미국은 건국의 역사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나라이며 실용성을 우선시하는 사상적 뿌리가 있다. 예술이나 인문지식보다는 ‘쓸모 있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풍토가 미국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다 복음주의에 입각한 반권위주의적 심성은 사회를 독점하려는 엘리트에 대한 궁극적 반감을 움틔웠다. 그리고 이는 ‘미국적 반지성주의’라는 듣기에도 아리송한 하나의 이즘을 형성시켰다. ‘지성’과 ‘속물’의 대립으로 평가되는 일련의 대통령선거에서 ‘속물’의 승리 같은 현실적 방증이 그러한 자기 평가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오로지 성공’이라는 사유로부터 비롯된 미국적인 속물근성, 예컨대 올비의 희곡 ‘아메리칸드림’에서 풍자되는 물질지상주의에 의한 공허와 영적 타락 같은 자기비하의 무엇일까. 호프스태터의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도 언설되듯이 이는 지성에 대한 맹목적 반감이 아니라 자기성찰이 결여된 권위적 지성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지성을 부적절하게 이용하는 특권층에 대한 반감, 지성의 작용 방식에 의문을 품는 성찰적 시선, 월권과 권력유착 같은 지성의 병폐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감시하려는 의식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보자면 ‘반지성주의’는 그야말로 사회의 기형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일 수 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의식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특수 현상은 아니다. 부실한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면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날 현상이다. 그래서 사회기저에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 제도권 언론은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전문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대중을 속인다는 의심, 진짜 지식과 진실은 항상 숨겨져 있다는 관념이 팽배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반지성적 영웅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탄생시키고 이에 따른 즉물적 정서와 사회적 후퇴라는 위험을 키울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 체득한 상식이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며 교육의 의미가 변질되거나 쇠퇴될 수 있다. ‘반지성주의’가 미국의 상황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며 사상적 담론의 사안만도 결코 아닌 까닭이다. 그리고 특히 지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반지성주의라는 모순적 현상에 직접 귀결된 상황에 처해 있다. ‘내로남불’이라는 윤리적 딜레마의 싹이 자라서 완성된 것 같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한국적 반지성주의의 엄연한 현상이자 결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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