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소통의 애국

2015.01.20 20:39 입력 2015.01.20 20:47 수정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영화 <국제시장>의 장면 하나가 화제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다투다 애국가가 울리자 싸움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 장면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 현실을 풍자한 장면이 주목받는 건 그때를 ‘참 좋은 시절’로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반응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렇게 해야 나라라는 소중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인상기를 남겼다. 덧붙여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며 애국심을 강조했다.

[정동칼럼]쌍방소통의 애국

이 소식을 접하며 문득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꽃잎>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장통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모두들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데, 주인공 소녀는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빠져나간다. 소녀는 1980년 5월21일 애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전남도청 앞에서 군인이 쏜 총에 엄마를 잃었다. 소녀에게 국가는 자신을 졸지에 고아로 만들어버린 살인자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5월21일 장면도 기억났다. 애국가가 울리자 시민들은 시위를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하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 그때 군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주인공은 동생을 잃었다.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나라, 그러니까 부부싸움도 멈추게 했던 1970년대 독재국가는 시위를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하던 국민을 향해 총을 쏜 그날, 죽은 나라가 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시민을 죽이고 들어선 신군부 독재 국가를 거부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국민적 저항의 산물이었다. 그 당시 시위현장에 뿌려진 전단지의 첫머리는 대개 ‘애국시민 여러분께’로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국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을 기약하며 독립운동에 전력하는 애국자가 되자고 호소하던 그때의 애국과 같은 맥락이었다. 독재를 넘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동참하자는 뜻을 담은 애국시민이었던 것이다. 반국민적 독재국가에 대한 일상적 저항도 늘었다. 영화관에선 영화를 틀기 전에 국민의례를 해야 했는데, 애국가가 울려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 시민이 늘었다. 오후 5시에 애국가가 울려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시민도 많아졌다.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새롭게 민주주의 역사를 써내려 가던 대한민국은 반국민적 독재국가를 향한 충을 강요하던 국기하강식을 1989년에 없앴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애국 담론은 민주주의 나라를 만드는 주체인 시민의 것이 됐다. 2009년에는 시민사회에서 애국주의 논쟁이 전개됐다. 참여사회연구소가 발간하는 <시민과 세계>에 소개된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이란 제목의 글이 논쟁을 촉발했다. 많은 관심을 끈 애국주의 논쟁은 ‘애국주의가 민주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그 민주적 애국주의가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한가’라는 두 질문을 화두로 날 선 공방을 이어갔다. 이듬해엔 민주적 애국주의 논쟁이 진보적 애국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민주적 애국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시민사회에서 애국주의 논쟁이 일어난 건 민주화 이후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시민이 함께 만드는 ‘내 나라’이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주권자 의식이 분명한 시민, 즉 1980년대가 고대했던 애국시민이 등장했다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발 막장 드라마와 소통불가의 국정 운영에 좌절하는 국민을 향해 일방통행식 애국심을 요구했다. 2015년 대한민국은 여럿이 애국 논쟁을 하던 시절을 뒤로 한 채 단 한 사람만이 애국을 강요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애국심이란 국가가 헌법이 부여한 의무, 즉 주권자인 시민의 인간 존엄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시민이 국가를 향해 자연스럽게 느끼는 연대나 헌신의 정서를 뜻한다. 국가가 본연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 시민이 비판하며 저항행동에 나서는 것, 시민불복종 역시 애국심의 발로다. 애국심도 쌍방소통의 길 위에서 생명력을 갖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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