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아가리 효과’

2015.09.10 21:11 입력 2015.09.10 21:14 수정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언론에 비친 대통령의 표정이 참 밝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대통령의 얼굴에서 이제 세월호의 충격도 메르스의 혼란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사고 이후 고조되었던 남북의 긴장이 8·25 고위급접촉으로 마법에서 풀린 듯 일거에 해소되었다. 곧이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은 이례적인 환대와 외교적 성과도 얻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귀국하는 기내에서 중국과 한반도 통일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국민들은 다시 불안하다. 불과 몇 주 전에 새로운 남북관계를 북한과 합의했는데 통일 논의는 중국과 하겠다는 대통령의 통일외교 방향이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이산가족 상봉 실무접촉이 무난히 진행되고 일정까지 나와서 8·25 합의가 일단 실천되고 있지만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지난 8월25일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고위급접촉이 성사되어 전쟁의 공포가 가시는가 싶더니 장시간의 깜깜이 마라톤회담을 지켜보며 시민들은 ‘혹시’ 하는 생각에 다시 가슴을 졸였다. 회담장의 문이 열리고 합의문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전쟁을 막았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화를 복으로 전환시킨 이번 합의를 소중히 여기고 풍성한 결실로 가꿔가야 한다”고 했고, 화답하듯 박근혜 대통령은 “합의를 잘 지켜나간다면 분단 70년간 긴장의 악순환을 끊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협력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회담의 당사자들은 전쟁을 막은 영웅이 되었고 대통령의 지지도는 급등했다.

그런데 급박했던 정세를 차분히 새겨보면, 전쟁위기를 조성한 것도 전쟁위기를 해소한 것도 모두 남북한 집권 당국자들의 몫이었다. 분단의 조건에서 남북관계를 조였다 풀었다 하는 것이 남북한의 당국과 집권세력에게는 정치 공학적으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은 생명과 생활을 담보로 피를 말린다. 남북의 집권 당국자들이 만든 위험에 떨다가 그들이 해소한 위기에 감사해야 하는 국민의 신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72년 국제적인 데탕트와 국내 정치의 위기 속에 남북이 합의한 최초의 통일원칙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통일이 곧 다가올 듯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 뒤 남한에서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에 대응할 강력한 통치체제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헌법 정지를 요지로 하는 대통령특별선언이 있었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적대적 공존의 시대가 열렸고 양쪽에서 독재가 안착되었다. 박정희의 국민과 2015년의 시민이 그 신세가 다르지 않다.

분단국가에서 전쟁의 위기와 긴장은 무엇이든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야수의 거대한 ‘아가리’를 떠올리게 한다. 분단의 아가리는 모든 사회적 이슈와 삶의 문제를 휩쓸어 삼켜버린다. 남과 북의 집권 당국이 분단의 목줄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동안 시민의 삶은 분단의 아가리를 들락거리는 먹이의 신세가 되고 만다. 분단의 아가리에서 시민의 숨통이 조여지면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군사적 대결로 인한 ‘불안의 비용’을 치러야 했다. 불안이 고조되면 냉전의 무덤에서 이념의 좀비들이 깨어나 광기 어린 춤판을 벌였다. ‘이념의 비용’이다. 분단의 위기는 북방경제의 기회를 차단해 ‘기회 박탈의 비용’을 치르게도 했다.

남북한 당국은 과도한 비용으로 시민의 삶을 먹어치우고 시민의 영혼을 희롱하는 분단의 아가리 효과를 이제 멈추어야 한다. 시민의 삶이 먼저이고 시민의 안전한 삶이 우선인 통일전략만이 위기를 관리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통일전략이기보다는 ‘협력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 시민이 선택하고 시민이 앞서는 남북협력의 기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시민 없는 남북관계는 불안하고, 위험하며, 부당한 ‘누군가의 게임’이 되기 쉽다. 정치적 통일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협력의 기반을 닦는 것이 우선이다. 양국 정상이 만나 ‘한반도 협력시대’를 선언하는 것도 좋겠다. 한반도 협력시대의 개막이야말로 분단의 아가리 효과를 종식시키는 시민을 위한 통일의 경로다. 한반도 협력 기반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신성장동력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막는 것은 ‘노동자들의 쇠파이프’가 아니라 남북의 집권 당국이 만드는 분단의 아가리 효과이다. 분단의 관리와 통일의 과정을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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