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같은 진단, 다른 처방

2015.09.08 20:59 입력 2015.09.08 21:09 수정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지난 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국회 대표 연설을 통해 ‘국정 역사 교과서 도입’을 주장했다. 같은 날 서울대 역사학 교수들은 황우여 교육부 장관에게 국정화 불가론을 담은 의견서를 직접 전달했다. 역사교사 2255명은 국정화 반대를 선언했다. 4일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국정화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금 역사학계는 국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처음 역사 교과서 파동이 일어난 2004년 무렵에는 뉴라이트 학자들과 역사학자들 간의 논쟁이 활발했다. 이명박 정부부터 양상이 달라졌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직접 역사전쟁에 뛰어들어 소송까지 당했다. 박근혜 정부도 자격미달인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로 거센 후폭풍에 시달렸다. 지금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시한폭탄의 버튼을 누르려 하고 있다. 여기에 여당 대표가 총대를 메고 선전포고하는 악역을 맡고 나선 셈이다. 지난 10여년간 역사전쟁에서 학문 대 학문의 논쟁적 성격은 거의 사라졌다. 정부와 정치인이 선도하면서 정쟁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역사전쟁을 정쟁의 무기로 삼는 권력에 맞서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중립성을 지켜내야 하는 일은 역사학계의 몫이 되었다.

[정동칼럼]국정화? 같은 진단, 다른 처방

한국에서만 역사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권력이 개입하면서 정쟁화하는 흐름도 한국만의 특징적 양상은 아니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도 보수권력의 이념 공세로 역사전쟁이 발발했다. 두 나라의 보수권력은 역사교육이 자학사관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조국의 번영에 대한 자부심을 함양하는 애국주의 역사를 가르칠 것을 요구했다. 영국에서는 대처 총리가 직접 나서 “모든 세대가 우리 민족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깎아내리는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를, 영국이 다른 국가보다 가장 앞서 나갔던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며 역사교육을 비판했다.

19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역사교육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역사교육 지침서인 <역사표준서>를 놓고 역사전쟁이 발발했다. 보수권력은 <역사표준서>가 다문화주의와 비서구문명, 여성과 흑인의 역사 등을 포용하는 관점에 서 있음을 비판했다. 미국의 과거를 험악하고 음울한 시각에서 보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우리나라는 본디 악하다’라는 믿음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보수권력이 ‘오랜 세기에 걸쳐 자유민주사회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배워야 할까? 아니면 억압받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역사를 배워야 할까?’라는 논쟁을 유발하며 역사교육을 공격했다. 김무성 대표 역시 자학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은 이 땅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발언에는 미국과 영국 보수권력의 공격 무기였던 ‘좌파가 주도하는 자학사관’이라는 논리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진단은 같은데 처방은 딴판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보수권력은 애국주의 사관의 고취를 주장했으나, 국가가 발행하는 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는 국가주의 교육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우익이 자학사관을 비판하고 나섰으나, 국정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역사 교과서 발행은 미국이 인정제, 영국이 자유발행제, 일본이 검정제로 운영하고 있다. 반면, 2015년 대한민국 여당 대표는 이렇게 주장한다. “편향된 역사관에 따른 교육으로 혼란을 겪지 않도록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하고 중립적인 시각을 갖춘 ‘국정 역사 교과서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언급한 ‘편향된 역사관’은 1974년부터 국정으로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 항상 따라다니던 꼬리표였고 국정이 폐기된 결정적 원인이었다. 게다가 자학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보수적 편향성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중립적인 시각의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는 역사 교과서를 원한다면,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정부가 역량 있는 학자들을 발탁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거쳐 중립적인 시각을 갖춘 역사 교육 과정을 개발한다면 좋은 교과서‘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국정화가 실현된다면, 독재를 넘어 민주화를 이룩한 ‘자유민주주의’ 나라 중에서 단 하나의 교과서로 국가주의 역사교육을 실시하는 유일한 사례로서 세계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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