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만세

2015.12.13 20:55 입력 2015.12.13 23:06 수정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테러방지법 제정을 다그치는 대통령의 성화가 보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테러방지법이 없음을 이슬람국가(IS)까지도 알아버렸다는 자학성 발언을 필두로 “상상하기 힘든 테러”가 발생하면 국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응석까지 나온다. 여기에 초비상사태에나 가능한 긴급재정경제명령권 운운하는 블랙코미디를 접하고 보면 정말 대통령과 그 일행들은 여기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한 저 유신선포문처럼 말이다.

[정동칼럼] 국정원 만세

그렇다고 테러방지법안에 무슨 핵무기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후진적인 국가들이 늘 그렇듯 이런저런 권력을 국정원에 집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국정원이 1년 365일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만만한 사건 몇 개를 골라 “테러”라는 이름을 붙여 대충 처리함으로써 국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끔 한 것이 전부다.

법안 자체도 별로 새롭지 않다. 대통령이 테러방지법이 없다는 국가기밀성 정보를 흘렸지만, 그것은 허허실실의 전략에서 나온 기묘한 역정보이다. 우리나라는 33년 전부터 ‘국가대테러활동지침’을 만들어 이미 완벽한 대테러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안은 이 지침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다고 해봐야 사이버테러방지법안에 국정원이 국민들의 휴대폰이나 SNS 등을 좀 더 쉽고도 당당하게 사찰할 수 있게끔 하는 조항 몇 개를 둔 것이지만, 이것도 여태까지 해오던 것을 명문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국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처럼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은 말이다. 누군가 내 휴대폰이나 SNS를 좀 본다고 해서 할 말 못하거나 못할 말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는, 대통령의, 대통령을 위한 국정원이라 총리나 국무회의는 물론 국회조차도 어찌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어찌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바뀌지도 않는다. 옛날 중앙정보부 시절처럼 이런저런 대소사에 국정원 직원이 끼어들어 간섭하는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뭐, 우리가 권력의 횡포에 당하고 살던 것이 어제오늘인가? 그저 무시무시한, “상상하기 힘든” 테러만 막을 수 있다면, 그래서 없는 위험에 억지 춘향 격으로 주어진 이 불안만 덜어낼 수 있다면 이 요지경의 세상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을.

바야흐로 국정원 만세인 세상이다. 오죽하면 대법원이 “인터넷 자체를 청소”하며 대선에 개입한 혐의를 받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구제하고자 나섰으랴. 초등학생에게 욕설과 성폭력적인 댓글을 퍼부었던 “좌익효수”라는 한 전투 요원에 대해 법원이 국정원 직원이라 볼 증거가 없다며 국가배상을 거부했다거나, 검찰이 그를 기소하는 데 2년6개월이나 걸릴 정도로 신중을 기한 것 또한 IS의 보복 대상에 포함돼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이다. 설령 국정원이 공안사건 실적을 위해 거리낌 없이 증거조작에 나서고 종북좌파 운운하며 국민들을 이간하는 대국민 심리전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그 역시 무책임한 국회 때문에 불안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눈감아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러방지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답은 간단하다. 그동안 평화시대를 살면서 국정원이 조금 나태해졌기 때문이다. 9·11 테러나 파리 테러가 발생하고 대한의 청년이 IS에 가입하고 이주민이 장난감총으로 IS를 찬양해도 국정원은 간첩잡기에만 매달려 이런 정보수집은 물론 ‘국가대테러활동지침’에 따른 테러대책회의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원래 법률도 대범하게 무시하는 국정원이라 한갓 훈령 정도의 지침을 알 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테러방지법은 이런 국정원을 새롭게 부활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실 간첩이니 종북좌파니 하는 것은 이제 국민들도 식상해하고 국정원 스스로에게도 너무 진부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반테러대책 운운하는 것은 너무도 창조적인 명분을 제공한다. 국정원의 모든 권력과 활동들은 “반테러”라는 이름이 부착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게다가 지금까지 음지에만 있던 국정원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국정 전반에 간섭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원하는 대통령에게 무한한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어 일거양득인 셈이다. 성동격서라고나 할까? 테러방지법을 말하면서도 그 핵심이어야 할 국정원의 해외정보 강화대책이 불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거나 우리의 서민적 글쓰기에서는 국정원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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