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 사무장, 간사님들께

2019.12.24 20:47 입력 2019.12.24 20:48 수정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이 없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일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는 고통에 처한 약자들을 돕고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며, 더 큰 ‘우리들’을 위해 일하고 싸운다.

[정동칼럼]총무, 사무장, 간사님들께

그런데 그 단체들은 거의 대부분 영세한 규모로 네댓 사람(심지어 한두 사람) 정도의 실무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유지된다. ‘총무, 사무(국·차)장, 간사’라 불리는 그들의 신념·열정·희생으로 이 조직들이 굴러가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한갓 각자도생과 생존투쟁의 지옥, 또는 수구 냉전 기득권 동맹과 위선가들의 게임장에 불과할 것이다. 총무, 사무장, 간사들은 함께 사는 ‘우리’의 ‘공통적인 것’(commons)과 후대에도 이어져야 할 진리와 가치를 지킨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을 대신해서 민주주의의 여러 전선에서 싸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이 하나인 데다 생업 때문에 거기 다 못 가보지만, 언제나 노동과 여성의 권리, 또 그보다 더 잘 안 보이는 데 있는 장애인, 비정규직, 빈민, 이주자들의 삶을 위해 싸우는 싸움터가 있다.

그런 공통체의 활동가·실무자들은 세상이 보통으로 여기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 사적인 생활을 희생하고 내 몸의 안위와 가족의 만족이 아닌 일, 돈 안되고, 빛 안 나는 일에 손발로 헌신한다. 어떤 이들은 삶과 청춘을 온통 ‘갈아넣으며’ 평생 분투하기도 하며, 자기 몸과 마음을 상하고 가까운 이들에게 본의 아닌 폐를 끼치기도 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1월 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2019 지속 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조사’를 행한 결과 인권단체의 활동가·실무자들은 평균 월급 168만원을 받고 있으며 4대보험이 없거나 잦은 초과근무를 감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비단 인권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을 큰 희생과 수고다. 생계와 비상근 활동을 겸하는 분들도 많은데, 그런 경우 더 쥐꼬리만 한 활동비만 받는 일도 허다할 것이다.

2019년 한 해 시민사회의 활동가들은 더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돈과 지위를 좇지 않는 그들에게 어쩌면 보람이나 ‘정치적 효능(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텐데, 올해는 개혁과 민주주의가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던 듯하다. ‘촛불혁명’ ‘촛불정부’ 같은 말도 더 무색했다. 수구 기득권동맹의 악랄한 발목잡기가 지금도 이어지는 가운데 정치·사법개혁은 물론 민생경제, 부동산, 교육, 노동 등에 있어서도 정부는 뭐든 하다 말거나 주저하며 뒷걸음질했다.

또 ‘조국사태’는 세대·진영·계층에 따라 갈라진 한국 사회의 분열상을 확연히 드러냈는데, 진보적 시민사회에도 전에 없던 괴로움과 상처를 가져왔다. 사태 속에는 적폐청산·검찰개혁의 당연함으로도 다 환치될 수 없는 근본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진보적 시민사회가 특히 아팠던 것은, 이 문제가 각자도생 사회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작은 사람들’과 시민사회 성원들의 기본 윤리와 존재론에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실련이 발표한 한국 사회 불로소득의 천문학적 규모와, 그 수혜자들 중에 청와대의 여러 관료들이 떡하니 포함돼 있다는 뉴스도 아프고 허탈한 충격이었다.

각자도생의 처세술은 총무, 사무장, 간사의 존재론과 반대편에 있다. 각자도생은 사람의 삶을 이해관계 기준으로만 인식하게 하고 웬만한 사람들을 모두 속물이나 위선자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아무도 진심으로 믿거나 존경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은 ‘진리’와 ‘공통적인 것’을 지워 없애고 트럼프형·이명박형 인간을 ‘승리자’ ‘능력자’로 만든다. 합법적 특권과 합법적 부패가 무한정 인정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2019년의 실망과 환멸이 진보 시민사회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투하는 공통체들과 열정 있는 활동가·실무자들이 있는 한 한국 민주주의는 난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딱 3년 전의 세모를 기억한다. 촛불로 열린 광장에서 수많은 보통의 시민, 노동자, 여성, 장애인, 청년들은 진정 ‘나라다운 나라’ ‘차별 없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희망으로 추운 거리를 메워 덥혔다. 전국의 수천 시민사회 단체들은 9년의 퇴락과 억압에도 일어서서 시민들과 어깨를 겯고 민주주의를 소생시켰다.

시민사회의 지속 가능을 위해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아는 간명한 것이다. 관심과 형편에 따라 몇 천원이라도 기부하고, 우선 그를 통해 애정을 가지는 것이다. 아직은 시민참여가 더 많이 필요하다.

희생하고 분투한 시민사회단체의 모든 총무님, 사무(국·차)장님, 실무자님들에게 깊은 감사와 연대의 뜻을 전합니다. 쌓인 몸과 마음의 피로가 풀리고 연말연시에 새 기운이 솟아나기를 기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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