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자유’민주주의

2023.05.25 03:00 입력 2023.05.25 10:26 수정

정권과 공권력의 직접적인 탄압 때문에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없었다. 노무현 정권 때의 배달호·김주익 등과 200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1970~1990년대의 전태일·박영진·양봉수들과는 다른 상황에서 죽음으로 항거했다.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 같은 신종 탄압이 원인이 되었다. 2014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경비노동자나 2019년 ‘타다 사태’ 때의 택시 노동자도 억울함을 풀고 호소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건설노조 양회동씨의 경우와 달랐다.

천정환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천정환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더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은 ‘민주화’ 이후엔 없던 일이다. 정권의 수뇌부가 노동조합을 구체적인 타깃으로 정하고, 해당 부처의 장관이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광기에 들린 듯 밀어붙이는 가운데 일어났다. 여당과 보수언론은 총력으로 허위 프레임과 선동을 쏟아부었으며, 검찰·경찰이 행동대로 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며 노조 자체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형사들에게는 ‘일계급 특진’이 걸리고 건설회사 사람들에게도 억지 수사의 압박이 가해졌다 한다. 간첩이라도 찾아내는 것처럼 전국의 건설현장에 ‘신고하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듯 600여명의 노동자들이 소환 조사를 받았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파트가 그렇게 많은 ‘간첩’과 ‘조폭’들에 의해 지어져왔는가. 왜 두 아이의 아빠이며 평범한 노동자 양회동씨는 ‘조폭’으로 몰려 목숨을 버렸는가.

권력의 동맹은 하도급 부조리 같은 건설산업의 진짜 고질에 대해서는 방치한 채 모든 책임을 (그들이 굳이 ‘민노총’이라고 줄여 부르는) 노조에만 들씌우고 있다. 작업복 입고 머리띠 두른 얼굴 검은 그들을 폭력배 또는 부조리의 화신이라 부르는 것이, 이런 시대의 문화적 감각에 어울리는지 모른다. 누가 이 시대의 진짜 조폭이며 공동체의 위험인가. 밤늦은 유흥가 사시미집에서 회식을 마친 후 오야붕에게 사열받던, 수십수백만원짜리 가다마이 걸친 중년사내들을 떠올리는 것은 내 문화적 감각이 이상하기 때문인가. <내부자들> 같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인가. 한국 언론사 중 건설자본과 직간접적으로 결탁해 있거나 아예 지배를 받는 곳은 어디어디라던가.

그런데 일련의 사태와 양회동씨의 죽음은, 노조 탄압이 대통령 지지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과 일부 시민들의 ‘노조 혐오’가 빌미가 된 일이다. 또한 건설현장의 부조리를 점잖게 ‘우려’하고 민주노총에 비판적인 ‘건전한’ 시민과 자유주의자들이 방관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소위 ‘촛불혁명’은 5년 만에 반전되어 시중에는 ‘검찰 독재’ 같은 말이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5년의 과정 자체뿐 아니라 ‘혁명’과 ‘독재’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 이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허점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재벌, 강남, 언론, 종교, 사학재단, 검찰 등의 동맹이 과거와 비슷한 ‘반민주 독재’ 세력인가. 또는 새로운 동의의 기제(헤게모니)를 틀어쥔 실체 있는 문화적 권력인가. 많은 이들이 새삼 분개하고 있는 조선일보 등의 행태도 짚어야겠다. 실로 그들은 1991년 유서 대필 조작 사건 같은 일을 다시 만들고 싶은 듯, 선동과 저주의 프레임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노총을 위시한 재야단체에 ‘간첩’ 이미지를 씌우기 위한 보도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다시 지지율이 낮고 정당성이 허약한 정권과 극우 언론이 ‘간첩’과 ‘노동(조합) 혐오’ 프레임에 의지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지배동맹은 ‘법’과 중산층의 생활양식은 물론 교육·종교를, 그리고 미적·윤리적 감각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허약한 한국 ‘자유주의’는 ‘독재’에 대항한다 하지만 여기에 쉽게 동조하고 결탁한다. 현 정권의 퇴행과 ‘독재’는 그 자체로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무능·부패에서 비롯됐으며, 그것을 여전히 가장 큰 방패로 삼고 있다. 특권층의 ‘합법적’ 투기에 대해 “뭐가 문제냐”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냐”는 식의 인식은 매우 안일하며 위험하다. 그것은 쉽게 ‘노동혐오’와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도 공모한다. ‘어른 김장하’를 존경하고 따르겠다는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이 시대에 부의 획득, 유지, 환원에 대한 다른 철학과 실천 없이 ‘진보’일 수 있을까. 투기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노조 혐오가 공존할 수 있을까. 따라서 민주노총과 건설노조를 위협하는 힘은 조선일보와 윤석열 정권만은 아니다. 민주노총과 건설노조를 지키는 데에는 복잡한 많은 것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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